고려시대 몇몇 인명의 자료
심심해서(?) 뒤적거리다가 보니, 생몰년 미상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진 몇몇 인물들에 대한 내용이 보이길래 집어 옵니다.
박창화의 유고는 일반적으로 소설(?)이라 여기시는 분들이 많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요...

남당 박창화 유고중 高麗史列傳에서

 

1. 黃周亮[983-1046]

성종 계미년 출생, 정종 병술년 卒. 黃山人.

어려서 外祖父인 大文守에게서 글을 배웠는 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다.

정종9년[1043] 문하시중이 됨. 시호는 景文.

거란의 난때 궁궐의 서적이 불타 없어져 버려, 왕명으로 태조부터 목종까지 7대 사적 36권을 편찬했다.

 

2. 尹瓘[1042년생]

정종 임오년 출생. 字는 同玄. 坡平人. 아버지는 執衡. 高祖는 莘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않았다. 문종때 과거에 급제.

예종때 오연총과 함께 여진을 정벌하여 9성을 쌓고 公嶮鎭에 비를 세워 경계로 했다.

지방이 300리로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북은 盖馬山에 끼였으며(介), 남으로는 長州와 定州에 접했다.

 

남당 박창화 유고중 麗史列傳에서

1. 黃瑩[1035-1108]

정종 을해년 출생. 예종 무자년 졸. 74세. 시호는 貞敬.

자는 光玉. 황주량의 손자. 腆實好學하여 겨울밤에 妻弟 魏繼廷과 독서를 하다가 닭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그친 적도 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처를 2명 둔 사람들이 많았지만 황영은 1妻만 두었다.

 

2. 異應甫[966-1048]

광종 병인년 출생. 문종 무자년 졸. 國老가 되어 83세로 죽음. 시호는 良懿. 응보는 율령에 밝고 技工, 造船, 造兵에 능통했다. 아들은 惟恭, 惟忠, 惟正으로 모두 賢貴했다.

 

3. 崔沆[972-1024]

임신년 출생. 갑자년 졸. 字는 內融.

平章事를 지낸 彦撝의 손자이고 아버지 光遠은 秘書少監을 지냈다.

 

4. 魏繼廷[1038-1108]

정종 무인년 출생. 예종 무자년 졸. 字는 洪明. 아버지는 畢. 7세에 글을 읽을 줄 알았다.

자라서 文名이 크게 떨치고 과거에 급제하자 뭇 재상들이 다투어 사위로 삼으려 했으나 전부 거절하고 황주량의 寡女에게 장가들었다.

 

by Comte | 2008/05/31 19:08 | 역사 | 트랙백 | 덧글(1)
辭海 - 중국역사지명 사전
사해의 분책으로 나온  중국역사지명 사전입니다.
pdf 파일을 solid  converter pdf로 돌리니 그대로 word 파일로 변환되더군요!!!!!!! good!!!
일단 간자체 파일 그대로 올립니다.
번자체로는 나중에...


sahae.rar
by Comte | 2007/12/14 19:19 | 역사 | 트랙백 | 덧글(11)
PDF 파일도 얼마든지 편집이 가능합니다

adobe acrobat등으로 만들어진 pdf  파일은 본문의 수정이 절대(?)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었는 데 천만의 말씀이었습니다.
acrobat 으로 불러서 본문의 오자나 글자를 첨삭하려해도 전혀 안되어 포기하고 있던 차에, 보물(?)을 얻었습니다.
물론 여러가지 pdf editor가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한글도 수정되는 것으로 다음 두가지가 있더군요.

Foxit pdf editor v2.0.1011
요거는 크기도 매우작고 또 설치할 필요도 없는 portable(요새는 요거 모으는 재미에 빠져있습니다)버전도 있어 정말 좋습니다. 다만 pdf 본문에 한글입력 하려면 별도의 애드인을 설치하고 약간의 조작을 해야하는군요. 단순한 뷰어인 Foxit pdf reader는 기존의 acrobat reader를 지워버리게 만들었습니다. 뷰어라고 해도 글자 긁어내 올 수도 있더군요....


infix pdf editor v2.090
요거는 어제 구한 건데... 물건이더군요..
portable 버전도 크기가 90여메가나 되지만 자체적으로 그냥 한글 입력 수정등이 가능합니다.

이제 이들을 써 그동안 모아 두었던 pdf 파일을 hwp나 doc 로 바꾸어볼까 합니다...

※ very pdf editor 2.2버전도 한글입력이 되는 군요

by Comte | 2007/12/09 14:38 | 잡동사니 | 트랙백 | 덧글(1)
Occult 4.0 버전을 받았습니다..
드디어 Occult 4.0 버전이 Iota 사이트에 올라왔습니다...
사용해볼 생각에 설렙니다.
저번 3.6버전은 버그가 있어 이런저런 착오가 간간이 보였는 데 이번에는 다 고쳤겠지.. 생각듭니다
고천문에 상당히 유용한 프로그램입니다...

요샌 이런저런 이유로 이글루에 거의 오지 못합니다....
by Comte | 2007/11/20 14:09 | 천문 | 트랙백 | 덧글(1)
동양 天文圖입니다
王力의 古代漢語 부록편의 천문도입니다.

恒星의 중국이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확대해도 잘 보입니다.

china_srarname.pdf
by Comte | 2007/07/28 13:47 | 천문 | 트랙백 | 덧글(1)
[자료] 辭海 역사분책 -中國古代史
辭海의 별책중 '중국고대사' 편입니다.
중국 고대역사지명, 고대 서적 해제 및 역사용어등을 모아놓은 자료입니다.
검색은 되지만 간자체입니다...
text 파일로 변환하려니 계속 오류가 나 그냥 올립니다..

sahae.pdf
by Comte | 2007/07/27 08:44 | 역사 | 트랙백
대동여지도 몇부분
대동여지도는
http://203.236.206.206/daedong2d/


요기에 가시면, 필요한 부분을 보실 수 있지만 조각 조각으로 보여 불편한 것도 있어 몇 부분의 것을 포토샵으로 붙여 만들었습니다.

아래 그림들은,
압록강구, 개성-강화 부근, 제주도, 백두산 부근 지도입니다

    



by Comte | 2007/07/25 18:34 | 역사 | 트랙백
대동사강 [大東史綱] 발췌번역(抄譯)

지난 며칠간 대동사강을 한번 훑어 보게되었습니다.
상고부분은 검증방법이 없겠지만 삼국시대부분은 삼국사기등이 있어 대조해 볼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부분들이 보여 그 부분들만 발췌해 번역해 보았습니다.
문자명왕이전의 말갈기록이라든지, 낙랑관련  부분등, 삼국사기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을 나름대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번 읽어볼 만한 책인 것 같습니다. 물론 기자조선이나 단군 조선부분은 아직 판단이 힘듭니다.
자체내에 연대나 간지, 기타 모순점도 군데군데 보이기도 합니다..
삼국사기보다 자세한 기록도 많이 보입니다.
출처를 밝히지 않아 그 전거가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daedong.pdf

2007.7.25 1차 수정
2007.7.26 2차 수정

by Comte | 2007/07/24 19:58 | 역사 | 트랙백 | 덧글(6)
중국 東三省 지명연혁자료입니다
중국의 요녕, 길림, 흑룡강성 3성의 지명(縣급이상)의 연혁자료를 모은 것 입니다.
간자체를 번자체로 바꾼 것이고, 검색가능합니다.

dong3.pdf
by Comte | 2007/07/24 14:07 | 역사 | 트랙백 | 덧글(1)
[자료] 중국역사기년표-중화서국
萬國鼎의 中國歷史紀年表 입니다.
중화서국 1978년발행판의 pdf 파일입니다.
각종 연호등의 자료입니다...
검색은 안됩니다..

.historytable.pdf 
by Comte | 2007/07/22 00:19 | 역사 | 트랙백 | 덧글(1)
百濟와 黃漆樹

대륙백제라는 망상에 사로잡힌 환빠들은 백제의 西海바다 얘기만 나오면 바로 꿀먹은 벙어리가 된다.

이제 환빠들을 한번 더, 나쁜 말로 떡실신시킬 수 있는 자료를 보이겠다.

 

통전/ 백제

國西南海中有三島,出黃漆樹,似小榎樹而大.六月取汁,漆器物若黃金,其光奪目.

 

物理小識 [明 方以智]

권9

朝鮮國有黄漆樹似棕六月取汁漆物如金今廣漆則黄江漆則黑

 

玉芝堂談薈 明 徐應秋 撰

권35

百濟西南海中有三島出黄漆樹似小櫌樹而大六月取汁漆器物若黄金其光奪目

 

태평광기

권406

黄漆樹

日濟國西南海中有三島各相去數十里其島出黄漆似中夏漆樹彼土六月破樹腹承取汁以漆器物若黄金其光奪目(出洽聞記)

※ 처음의 日자는 百의 오기일 것이다 

竹嶼山房雜部 明 宋詡 撰

권9

漆(長葉身短朝鮮國有黄漆樹似棕六月取汁漆物如金)

 

이들 자료를 보면, 백제에서는 그 서남쪽 바다에 있는 섬 3곳에서 황칠수라는 진귀한 나무가 나며 이를 칠하면 황금빛이 난다는 것이다.

이 섬들이 구체적으로 어디인 가는 조선왕조실록에 분명히 보인다.

 

정조 41권, 18년( 1794 갑인 / 청 건륭(乾隆) 59년) 12월 25일 무인 3번째기사

호남 위유사 서용보가 별단을 올리다

...

1. 완도는 바로 황칠(黃柒)이 생산되는 곳이기 때문에 본도의 감영·병영·수영 및 본도의 지방인 강진·해남·영암 등 세 읍에다 모두 연례적으로 바치는 것이 있고 왕왕 더 징수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근년 이래로 나무의 산출은 점점 전보다 못한데 추가로 징수하는 것이 해마다 더 늘어나고, 관에 바칠 즈음에는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고 뇌물을 요구하는 일이 날로 더 많아지니 실로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금년에 바람의 재해를 입은 후에 큰 나무는 또한 말라 죽은 것이 많고 겨우 어린 나무 약간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황칠(黃柒)은 또한 기물의 수요에 관계되는 것인 만큼 마땅히 배양하고 심고 가꾸어 국용에 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10년을 한정하여 영과 읍에 으레 바쳐오던 것을 아울러 감면하여 오래 자라는 실효가 있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비록 옛날 상태를 회복하여 규례대로 납부하게 된 뒤라도 과외로 징수하는 폐단은 엄격히 조목을 세워 일체 금단해서 영원히 섬 백성들의 민폐를 제거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湖南慰諭使徐榮輔進別單曰:...

一, 莞島卽黃漆所産之地, 故本道監兵水營及本島地方康津、海南、靈巖等三邑, 皆有年例所納, 往往有加徵之弊。 挽近以來, 木産漸不如前, 加徵歲有所增, 而納官之際, 吏屬操縱, 情債日多, 實爲難支之弊。 今年風災之後, 大株又多枯損, 堇有穉木略干而已。 黃漆亦係器物緊需, 則所當培養栽植, 以備國用。 自今限十年, 營邑例納, 幷許減免, 俾有長養之實效。 雖於例納復舊之後, 科外加徵之弊, 嚴立科條, 一切禁斷, 永除島中民瘼恐宜。

 

자료를 찾아보아도 황칠수가 나는 곳은 세계에서 완도부근이 유일하다 한다.

즉 황칠수가 나는 곳의 물리적인 위치가 고정되니 이제 백제는 그 동북방향에 있을 수밖에 없고 이곳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 대로 충청도 부여나 공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환빠는 시비를 걸려할 지 모른다.

완도가 과연 백제의 서남에 있냐고...............

 

이제 계산으로 보여주마..

백제의 도읍은 부여 아니면 공주이다.

부여[동경 126도 55분, 북위 36도 17분]

공주[동경 127도 07분, 북위 36도 27분]

莞島중심부[동경 126도 42분, 북위 34도 21분]

 

각 지점간의 거리를 계산 해본다[지표상 직선거리]

 

                         부여

                           |

(부여-완도 215km) | (부여 -A간 214km)

                           |

   완도 -- 20km-- (A)

A : 경도는 부여와 같고 위도는 완도와 같은 지점

 

이 값들을 가지고 완도-부여-A 지점간 각도를 계산하면 약 6도가 얻어진다.

 

마찬가지로,

 

                         공주
                           |

(공주-완도 236km) | (공주 -B간 233km)

                           |

   완도 -- 38km-- (B)

B : 경도는 공주와 같고 위도는 완도와 같은 지점

 

이 값들을 가지고 완도-공주-B 지점간 각도를 계산하면 약 9도가 얻어진다.

즉, 공주나 부여를 기준으로 볼 때, 완도는 그 서남방향에 있는 것이다.

 

더 정확히 해볼 까??

옛날에는 그 방향을 측정할 때 나침반을 이용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나침반이 가르키는 자북과 진북은 약간 차이가 난다.

이 차이를 자편각이라 부르는 데, 그 값은 매년 변하나, 우리나라에서는 약 5-8도사이를 변동하는 것으로 측정된다.

과거 백제시대 이 값이 얼마였는 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현재와 큰 차이가 없다고 추정하면, 대략 7도 정도가 될 것이다.

즉, 이 값만큼 자북이 진북보다 서쪽을 가르킨다.

따라서 위의 6도와 9도는 진북을 기준으로 한 방위각이므로, 옛 사람들이 나침반으로 잰 방위각은 , 부여에서 완도를 볼 경우, 남에서 서로 약 13도, 공주에서 완도를 볼 경우는 남에서 서로 약 15도 치우친 것으로 나타났을 것이며 이 방향은 바로 서남방향에 다름 아닌 것이다.


환빠들이여!

헛소리하기 전에 황칠수가 어디에서 나는 지 먼저 알아들 보거라.......

by Comte | 2007/07/13 16:38 | 역사 | 트랙백 | 덧글(11)
키를 잘못 눌러 삭제되어버림..................
중국고금지명대사전 글이, 키를 잘못눌러 삭제되어버렸다... 댓글도 있었는 데....쩝...............아깝다..........
by Comte | 2007/07/06 19:10 | 잡동사니 | 트랙백 | 덧글(1)
고대에 바닷길의 거리는 어떻게 재었을까?
후한때 記里鼓車가 발명되어 육지에서의 거리는 기계로 측정되었다지만 바닷길의 거리는 고대에 어떻게 재었을 까???

최근의 기록이지만, 淸대 徐葆光의 中山傳信錄에 그 설명이 있다.

海中船行里數皆以更計;或云百里為一更,或云六十里為一更,或云分晝夜為十更。今問海舶夥長,皆云六十里之說為近。「舊錄」云:『以木柹從船頭投海中,人疾趨至梢:人、柹同至,謂之「合更」;人行先於柹,為「不及更」;人行後於柹,為「過更」』。今西洋舶用玻璃漏定更,簡而易曉:細口大腹玻璃瓶兩枚,一枚盛沙滿之;兩口上下對合,通一線以過沙。懸鍼盤上,沙過盡為一漏,即倒轉懸之;計一晝、一夜約二十四漏。每更船六十里,約二漏半有零。人行先木柹為「不及更」者,風慢、船行緩,雖及漏刻,尚無六十里,為「不及更」也;人行後於柹為「過更」者,風疾、船行速,當及漏刻,已踰六十里,為「過更」也。

이로 보건 대, 바닷길의 里수는 경과시간당 얼마로 계산한 모양이다.

즉, 하루를 10경으로 나누어 매更당 100리 또는 60리로 역산하였다...
1경이 2.4시간이니 지금으로 환산하면 시속 42리 또는 25리인 셈이다...
우리나라 연행록기록중에도 보면 하루에 천리 또는 몇백리를 갔다는 기록이 보이는 바, 위의 방식대로 계산한 것이 분명해보인다...
어떤 때 백리 또는 육십리인 지는 분명하지 않다. 위의 기록에는 60리로 잡았는 바 해류의 움직임과 바람의 방향등을 감안한 것이 아니었을까?????

by Comte | 2007/06/20 23:15 | 역사 | 트랙백 | 덧글(2)
後漢書 군국지에 의한 각지점간 거리 [洛陽 기준]

지점명(郡)

현재지명

지리좌표

기록거리(里/km)

MapChina2006(km)

京兆尹(長安)

섬서성 西安市 長安區

108.9E/34.3N

950/390(410)

410

長沙

湖南長沙縣

113.0E/28.2N

2800/1160(1200)

960

會稽

浙江紹與縣治

120.6E/30.0N

3800/1580(1620)

1170

武威

감숙성 武威縣

102.6E/37.9N

3500/1450(1500)

1290

酒泉

甘肅酒泉縣治

98.6E/39.8N

4700/1950(2010)

1740

敦煌

甘肅敦煌縣治

94.7E/40.2N

5000/2070(2140)

2150

涿

北京市涿縣治

115.9E/39.5N

1800/750(770)

790

遼東

요녕성 遼陽市

123.2E/41.3N

3600/1490(1540)

1490


MapChina2006: 낙양시 古城 기준. 자동차 도로경로(고속도로 포함). 10km단위로 반올림.

 

후한대 1尺 =

23.04cm 이 경우 10리 = 4147m

23.75cm 이 경우 10리 = 4275m

10%이내로 일치하는 곳 : 장안, 돈황, 탁, 요동
차이 많은 곳 : 장사, 회계, 무위, 주천

원인: 차이가 많이 나는 곳 전부가 현대치가 작다. 고속도로로 거리가 직선화가 많이 된 탓인가??????

by Comte | 2007/06/20 20:29 | 역사 | 트랙백 | 덧글(1)
[자료] 사부총간 서목

사부총간 書目입니다.


아시다시피,

사부총간은

장위안지[張元濟] 등이 편찬한 중국의 총서로 상하이[上海]의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서 1922년 ~ 1936년(중화민국시대)에 걸쳐 발행된 것입니다.

사부총간은 初編、續編、三編으로 나누어져 있는 데, 매 편은 다시 經,史,子,集의 4부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초편은 1919년 인쇄가 시작되어 1922년 완성되었으며 323종 8548권의 책으로 되어 있습니다. 초편은 1924년에 21종의 판본을 교체하여 8573권으로 증보 발행되었고 약간의 교감기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속편은 1934년 완성되었는 데 81종 1438권을 수록하고 있으며,

1936년에 출간된 삼편은 73종 1910권을 수록하고 있고 출판하려던 제4편은 이차대전으로 중단되었습니다.

 

正續三編을 합하여 477종 3134책입니다。

 
사부총간에는 사고전서(36000여책, 79000여권)에 수록되지 않은 89종의 서적을 싣고 있기도 합니다...

전자판으로 나온 것, 물경 400만원이랍니다....

sbck.pdf

by Comte | 2007/06/15 13:06 | 역사 | 트랙백 | 덧글(4)
최영 장군의 출생지는 철원

국사편찬위원회의 질문에 올라온 답을 보니, 자료가 없어 모르겠단다... 정말 국편위 뭐하는 덴지.... 너무 무성의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원도 편을 보면, 철원도호부조에 최영이 나온다.
즉, 최영은 강원도 철원 출신인 것을 쉽게 확인할 수가 있다...
본관을 적은 게 아닌가 할 수도 있지만, 평양석다산 출신인 을지문덕이 평양조에, 평산 신씨시조인 신숭겸이 전라도 곡성현조에, 경기도 금천현 출생인 강감찬이 해당조에 적혀 있는 것을 보면 본관이라기 보다는 출생지일 것 같다...


구체적으로는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하갈리가 최영장군의 출생지라 한다....

by Comte | 2007/06/12 20:54 | 역사 | 트랙백 | 덧글(1)
황당고기가 위작인 다른 증거

환단고기 僞作의 증거.

 

[요 글은 디시의 어느 분의 글을 보고 추가하여 작성합니다.

디시도 가끔씩은 쓸만한 내용이 올라옵니다...]

 

桓檀古記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하편에 다음 내용이 있습니다.

(이하 환단고기는 임승국이 번역 주해한 정신세계사 1986.6 재판 것을 기준합니다. 물론 이 번역도 임승국 자신의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님이 밝혀졌습니다만...)

==============================================================================================================================

정묘년 아들 누사가 즉위하더니 무인년에 천자를 찾아 뵙고는, 태자 등올과 작은 아들인 등리가 별궁에서 한적하게 기거하고 있음에, 태자 형제들에게 노래를 바쳤다.

 

형은 반드시 동생을 사랑하고

동생은 마땅히 형을 공경할지니라.

항상 터럭 같은 일로서

골육의 정을 상하게 하지 말아요.

 

말도 오히려 같은 여물통에서 먹고

기러기도 역시 한 줄을 만드나니

내실에서 비록 환락하나

세언일랑 삼가 듣지 마소서

==========================================================================================================(224-225쪽)

노래의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兄隱伴多是 弟乙 愛爲古 弟隱味當希 兄乙 恭敬爲乙支尼羅

恒常毫毛之事魯西 骨肉之情乙 傷扈勿爲午

馬度五希閭 同槽奚西 食爲古 雁度 亦一行乙 作爲那尼

內室穢西非綠 歡樂爲那 細言乙良 愼聽勿爲午笑

 

주장대로 서력전 943년에 지어진 이 노래가 현재 漢字음으로 읽으니 그대로 맞아들어간다는 것은 무슨 조화입니까??

그 천수백년 후의 신라시대 향가는 그렇게 해독이 어려운 데....

 

답은 가까운 데 있었습니다....

 

또 다른 僞書 단기고사에 다음 내용이 보입니다.

----------------------------------------------------------------------------

12년에 임금께서 후단조와 더불어 한 뿌리의 자손임을 감동하여 형제시를 지으니

 

형은 반드시 그 아우를 사랑하고 兄順愛其弟

아우는 마땅히 그 형을 공경할지라. 弟必恭其兄

항상 자그마한 일로 當以毫毛事

골육의 정을 상하지 말지라 莫傷骨肉情

말도 한 구유에서 먹고 馬亦同槽食

기러기도 또한 한 줄을 이루나니 雁亦一行成

방안에서 비록 즐기나 宅室雖云樂

부인의 맘을 삼가하여 들으라 婦言愼勿廳

(이것이 五言詩의 시작이다)

 

기자조선 제14세 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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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고사는 1949년본이 最古의 것이고 환단고기는 1979년본이 最古이니 일단 환단고기는 단기고사의 것을 베껴서 어슬프게 향가 흉내를 낸 것임이 분명합니다.

 

문제는 이제 시작입니다.

(오언시의 시작은 무슨 얼어죽을...)

윤휴[1617-1680]의 백호전서 제32권 잡저(雜著) 백록동규 석의(白鹿洞規釋義) 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입니다.

 

형은 꼭 아우를 사랑하고 / 兄須愛其弟

아우는 꼭 형에게 공손해야지 / 弟必恭其兄

사소한 이해를 따지다가 / 勿以纖毫利

골육의 정 상해서야 될 일인가 / 傷此骨肉情

주공은 당체의 시를 썼고 / 周公賦棠棣

전씨는 자형화 보고 느꼈었네 / 田氏感紫荊

형제는 같은 부모의 자식이거니 / 連枝復同氣

부인의 말만 듣지를 마오 / 婦言愼勿聽

 

- 이는 형제(兄弟)에 대한 것이다. -

 

윤휴는,

“근간에 정학(正學) 방효유(方孝孺)가 쓴 가범 사잠(家範四箴)을 보았더니, 그것은 학규 가운데 윤서(倫序)의 조목을 근간으로 한 것으로 만들어진 말과 내용이 아름답고 간략하면서도 진실하여 사람을 감발시키기에 충분한 면이 있었는데, 아마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교재가 아니었던가 싶다. 내가 이것을 읽어보고 좋다고 느껴져서 그 중에 하나 빠졌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내 뜻대로 만들어 넣어 사잠(四箴)을 오잠(五箴)으로 만들었다. 또한 뒤에는 학규의 오사(五事)를 같은 방법으로 통론을 가해 의례(義例)와 비슷하게 꾸미면서 체제는 운어(韻語)를 썼고 아울러 그 출전까지 밝혀 집안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이용하게 하였다. 취지는 정자(程子)가 이른 바, “고시(古詩)는 이해하기가 어려우므로 지금 사람들이 하는 말로 별도의 노래를 만들어 아이들이 조석으로 그를 노래하게 하면 틀림없이 도움이 있을 것이다.”고 하신 그 취지를 딴 것으로, 우선 주부자의 학규를 편(篇) 머리에다 붙여 백록동규 석의라고 하였고, 거기에다 방씨(方氏)의 유의잡잠(幼儀雜箴) 20편, 면학시(勉學詩) 24수를 부기하고, 이어 주부자의 감흥시(感興詩) 20편으로 끝맺음을 하였다“

라 하여, 위 시가 方孝孺의 작품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방효유 [方孝孺, 1357~1402]

중국 명나라 초기의 학자.

자 희직(希直) ·희고(希古). 호 손지(遜志). 저장성[浙江省] 닝하이현[寧海縣] 출생. 방정학(方正學)이라고도 한다. 송염(宋濂)의 문하에 들어가, 뛰어난 재주로 이름을 떨쳤다. 평소부터 왕도(王道)를 밝히고 태평(太平)을 이룩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 생각하고, 세속적인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혜제(惠帝)를 섬겨 시강학사(侍講學士)로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402년 연왕(燕王: 뒤의 永樂帝)이 황위(皇位)를 찬탈한 뒤, 그에게 즉위의 조(詔)를 기초하도록 명하자 붓을 땅에 내던지며 죽음을 각오하고 거부하였다. 연왕은 노하여 그를 극형에 처하였고, 일족과 친우 ·제자 등 847명이 연좌되어 죽었다고 한다. 저술에 《주례변정(周禮辨正)》 등 몇 가지가 있었으나 모두 영락제에 의해 소각되고, 《손지재집(遜志齋集)》(24권) 《방정학문집(方正學文集)》(7권)이 전할 뿐이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명나라초기의 방효유의 이 시를 , 단기고사를 위조한 자가 글자 몇자만 고쳐 오언시의 효시라 조작하고, 이유립은 이 단기고사를 고대로 향가랍시고 다시 조작하여 환단고기에 옮겼던 것입니다.

 

황당고기 이름 참 잘지었다.....

by Comte | 2007/06/09 10:11 | 역사 | 트랙백 | 핑백(1) | 덧글(2)
백두산의 높이 200里

백두산의 높이가 200리라한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백두산의 높이 2744m와는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조선시대 10리가 얼마인지 불확실하지만, 위의 山高200里라는 기록은 중국측의 자료를 그대로 옮겨온 듯하니, 청대의 10리=5760m에서 보면, 무려 115km라는 가공할(?) 수치다..

전혀 엉터리 기록인가???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현재의 산의 높이는 평균해수면기준으로 잰 것이지만 옛날에 그러한 기술이 없었을 테니 뭔가 다른 방법으로 산의 높이를 재었을 것이다.

물론 별로 높지 않은 산이야, 구장산술등에도 있지만, 막대기 그림자의 비례등으로 재었던 것 같다.

중국 사료를 잠깐 보니 山高xx里라는 기록이 제법 보인다.

몇십리짜리가 제일 많이 보인다.

어떻게 재었다는 직접적인 자료를 아직 찾지 못해 단정은 못한다.

 

중국 섬서성에 太白山이 있다.

산의 높이는 3767m인데 기록상으로는 山高300里다.

백두산의 높이와 실제 해발고도와의 비는 14정도이고 태백산은 13정도다. 뭔가 전혀 엉터리인 수치는 아닌 것 같다...

 

by Comte | 2007/05/30 13:53 | 역사 | 트랙백 | 덧글(7)
강감찬, 유검필, 견훤으로 읽어야 맞다...
※ [닉네임을 잊혀진미래에서 Comte로 바꿉니다...]

전에도 고려의 명장 姜邯贊을 '강감찬'으로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읽어야 맞다고 자료를 올린 적이 있는 데, 그 당시 조사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1908년의 문헌에 '강감찬'이라는 한글 표기자료가 있는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이제 다시금 이 주장을 입증하는 새로운 자료를 찾았기에 이에 공개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에서 찾은 놀라운 자료다. 환빠들의 주장을 완전히 뭉개버릴 수 있는 자료다..
'강감찬'이라는 표기는 적어도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환빠들이 다시금 헛소리 하지 말기를 바란다. 환빠들이여...무식하면 그냥 입다물고 있어라...
와중에 다른 새로운 자료도 부가적으로 몇가지 찾았다.

아시다시피 고려의 또다른 불패의 명장 庾黔弼은 중간에 黔자가 발음이 '검'이나 '금'이어서 일반적으로 유금필로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금'은 귀신이름이고 '검'은 검다는 뜻이어서 나는 유검필이 맞다고 생각해왔다. 사람이름에 귀신이름 '금'이라니....
이제 그 확증을 찾았다.
위의 자료에서 전부 '유검필'로 한글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유검필장군으로 제대로 불러주자....

마지막으로 후백제의 甄萱은 甄의 음이 眞이라는 자료가 있어 진훤이 맞다고 알려져 있으나, 기존의 자료에서 그 표기를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이제 찾은 자료에서는 분명히 '견훤'이라 표기되어 있어 진훤이라는 발음이 있었다 하더라도 상당히 오래전에 '견훤'으로 지금의 발음이 된 것 같다...

강감찬이요,
유검필이요, 견훤이다...

===============이하는 근거자료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에서....

[한글 고어체는 깨어져 보이지 않아 맨 아래의 별첨의 파일을 참조바람]
 

姜邯贊을 강감찬으로 표기한 최초의 기록

 

1]서명 조야쳠(朝野僉載)v9

한글서명 조야첨재

대표서명 권수제(권두서명)에 의함

표지제한글(한자) 조야첨재(朝野僉載)

편저자한글(한자) 윤형성(조선); 윤득재(조선)등 편(尹衡聖(朝鮮); 尹得載(朝鮮)等 編)

간행년(서기력) 1725-1776

간행년(왕력) 英祖年間(1725 - 1776) 寫

간행처 미상

언어 한글 고어

판사항 寫本

종이재질 紙質 : 壯紙

형태서지 b a線裝53卷 53冊; b 삽도,판식 : 無郭, 無版心, 無絲欄, 半葉 10行 21字, 註雙行, 無魚尾; c 크기(세로x가로) : 31.5 × 21.5cm1

내용주기 序 : 쳥뇽(靑龍) 국츄의 한한옹은 산방의셔 졔노라

인기 印: 藏書閣圖書印

청구기호 K2-291

등록번호 41007447v9

소장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MF MF35-353-355

주제분류 史部, 雜史類

 

조야첨재 권9

신미 원년(辛未 元年)

... 명샤 고려(高麗) 공신의 공덕 잇  갈여 샤당의 향라 시니 태개국 무공공(太師開國武恭公)복지겸(卜知謙)과 태개국 쟝졀공(太師開國莊節公)신슝겸(申崇謙)과 태개국 튱녈공(太師開國忠烈公)홍유(洪儒)와 태문하지즁 인헌공(太師門下侍中仁憲公)강감찬(姜邯贊)과 태개국 무렬공(太師開國武烈公)현경(裵玄慶)과 태령 쟝위공(太師內史令章威公)셔희(徐熙)와 태개국 튱녈공(太師開國忠節公)뉴검필(庾黔弼과 슈태보 문하시즁 문슉공(守太保門下侍中文肅公)윤관(尹瓘)과 문하시즁 문녈공(門下侍中文烈公)김부식(金富軾)과 문하시즁 위렬공(門下侍中威烈公)김려(金就礪)와 문하평쟝 안호(安祐)와 슈문하시즁 문튱공(守門下侍中文忠公)y 뎡몽(鄭夢舟)러라 그윽이 각건   태죄(太祖) 비록 츄회신 이 계시다 나 긔의 진실노 징험이 업고   태종(太宗)이 비록 노흐라 신

하 계시나 은혜와 녜 더으지 아니시고   셰종(世宗)조의 니러 문교 드지 아니미 업 홀노 큰 졍 궐여시니 망이 당시 신의 죡히    셩도 쳔양치 못 이시니 그 두터온 바 츄구하면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이 비록 뉘웃고 한시나 능히 당일 간신의 나라 그 죄 바게 못신 뉴경일(劉敬一)의 말이 다만 가히  희미히 착  드러고 우리   태종(太宗)조로 여금 형당이 도로혀 남당 니시의 히 젹신을 다림의 븟그러오미 잇지라 그런 고로   셰종(世宗)조의 군신이 이 피여 인슌여 베플고 고 사이 업더니   ...

문묘의 니러 능히 션지 니어 덕음을 환발샤  년의 치 못 법을 일조의 쾌히 드러 계신지라 공셩이 오샤 무왕(武王)과 쥬공(周公)은 그 달 효신져 사의 을 션계며 사의 일을 션슐신다 시니 그 우리 문묘 니민져[주:야언별집(野言別集)]

 

2] 서명 됴야긔문(朝野記聞)v2

한글서명 조야기문

대표서명 권수제(권두서명)에 의함

표지제한글(한자) 조야기문(朝野記聞)

편저자한글(한자) 서문중(조선, 1634-1711) 찬(徐文重(朝鮮) 撰)

간행년(서기력) 미상-미상

간행년(왕력) 寫年未詳

간행처 미상

언어 한글 고어

판사항 寫本

종이재질 紙質 : 楮紙

형태서지 a 장정,분량 : 線裝23卷 23冊; b 삽도,판식 : 無郭, 無絲欄, 半葉 12行 18 - 21字, 註雙行, 無版心; c 크기(세로x가로) : 27.4 × 18.5cm

내용주기

인기 印: 藏書閣圖書印

청구기호 K2-288

등록번호 41007402v2

소장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MF MF35-338-340

주제분류 史部, 雜史類

 

조야기문 권2

뎐녜고(典禮故事)

...태조(太祖) 향은 처음의 됴쥰(趙浚)남은(南誾)됴인옥(趙仁沃)으로 엿더니 모든 의논이 남은(南誾)은 국가 만셰지라 도로 긋티니라태종(太宗) 하교로 슝의뎐의 튜고 복겸디(卜謙智)홍유(洪儒)신슝겸(申崇謙)뉴검필(庾黔弼)현도(裴玄度)셔희(徐凞)강감찬(姜邯贊)윤관(尹瓘)김부식(金富軾)김녀(金就礪)됴튱(趙冲)김방경(金方慶)안우(安祐)니방실(李芳實)김득(金得培)뎡몽쥬(鄭夢周) 등 십뉵 신을 향다태죄(太祖) 나라흘 셰오시매 문묘 짓고  계셩뎐을 지어 션왕을 밧드러 겨시더니   태죄(太祖) 승하시매 뎐호 인라 고 후의 문쇼라 곳티고   태종(太宗) 원묘 광효뎐이라 엿더니   셰종(世宗)이 군신과 의논샤 흘 궁셩 안 여 침뎐을 짓고 인+야 ...

 

3]조야회통

서명 됴야회통v20

한글서명 조야회통

대표서명 권수제(권두서명)에 의함

표지제한글(한자) 조야회통(朝野會通)

편저자한글(한자) 편자 미상(編者未詳)

간행년(서기력) 미상-미상

간행년(왕력) 寫年未詳

간행처 미상

언어 한글 고어

판사항 寫本

종이재질 紙質 : 楮紙

형태서지 a 장정,분량 : 線裝, 不分卷 54冊; b 삽도,판식 : 無郭, 無絲欄, 半葉 11 - 12行字數不定, 註雙行, ; c 크기(세로x가로) : 21.2 × 19.1cm- 23 × 19.1cm

내용주기

인기 印: 藏書閣印

청구기호 K2-97

등록번호 41005556v20

소장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MF MF35-1278-1281

주제분류 史部, 編年類

 

조야회통 권20

선조조

신츅 삼십년(辛丑 三十四年)

...진(晉)의 왕무홍(王茂弘)[주:왕도(王導)]과 송(宋)의 니긔(李伯紀)[주:니강(李綱)]와 녀(麗)죠의 강감찬(姜邯贊)은 공이 그 뉴필이 아니랴 니완평(李完平)이 처음 각에 드러 보게블식[주:쳥념치 아니탄 말]으로 공을 논얏더니 후에 공 인야 공을 가 뵈니 긔미이 업고 머므러 말야 오 번족의 혼상을 다 내게  고로 궤유 밧지 아니치 못니 계의 나미 니의 당연 배라 더니 마 향족이 편지야 혼슈 빈대 공이 즉시 시비 블너 오 져 역관 아모의 보낸바 비단을 가져 오라 죵이 드러갓다가 다시 나와 오 본  업이다 공이 쇼왈 부인 공이 좌므로 휘코져 미라 고 촉야 가져와 왼 봉 거 다 주니 니공이 그 도량을 항복야 죵신토록 경즁더라 ○길운졀(吉雲節)뎡덕유(鄭德兪) 등이 모역 복쥬+니 ...

 

조야회통 권1

태조조

임신 원년(壬申 元年)

...[주:홍무 이십오년(洪武 二十五年)] 칠월 병신의 고려(高麗) 시즁 극념(裵克廉) 등이 공민왕(恭愍王) 비 안시(安氏) 명으로 보 권진오니   왕이 드여 숑경(松京) 슈챵궁의셔 즉위시니라   ...대 드여 태조(太祖)현종(顯宗)문종(文宗)원종(元宗)이 공덕이 셩의 잇다 야 다만 군을 졔고 아 문종(文宗)됴의 명샤 왈 슝의뎐이라 고 먼 손 왕슌녜(王循禮) 브샤 벼을 슝의감을 주시니 질이 뉵품이라 그 졔 밧들게 고 려됴(麗朝) 명신을  향니 혹 니 태종(太宗) 하교라 더라 복디겸(卜智謙)홍유(洪儒)신슝겸(申崇謙)유검필(庾黔弼)현됴(裵玄度)셔희(徐凞)강감찬(姜邯贊)윤관(尹瓘)김부식(金富軾)김녀(金就礪)죠튱(趙冲)김방경(金方慶)안우(安佑)니방실(李芳實)김득(金得培)뎡몽쥬(鄭夢周) 십뉵인이러라 명종(明宗)됴의 질을 삼품을 더야 뎐 셰습게 고 왕태조(王太祖) 화상이 풍긔(豊基) 뇽쳔의 잇더니 만녁 병(萬曆 丙子)의  명샤 의+쟝을

 

※ 甄萱의 한글표기

1] 조야첨재

서명 조야쳠(朝野僉載)v1

한글서명 조야첨재

대표서명 권수제(권두서명)에 의함

표지제한글(한자) 조야첨재(朝野僉載)

편저자한글(한자) 윤형성(조선); 윤득재(조선)등 편(尹衡聖(朝鮮); 尹得載(朝鮮)等 編)

간행년(서기력) 1725-1776

간행년(왕력) 英祖年間(1725 - 1776) 寫

간행처 미상

언어 한글 고어

판사항 寫本

종이재질 紙質 : 壯紙

형태서지 b a線裝53卷 53冊; b 삽도,판식 : 無郭, 無版心, 無絲欄, 半葉 10行 21字, 註雙行, 無魚尾; c 크기(세로x가로) : 31.5 × 21.5cm1

내용주기 序 : 쳥뇽(靑龍) 국츄의 한한옹은 산방의셔 졔노라

인기 印: 藏書閣圖書印

청구기호 K2-291

등록번호 41007439v1

소장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MF MF35-353-355

주제분류 史部, 雜史類

 

권1

[태조]계유 이년(癸酉 二年)

...가져 도라오니 본부 우시랑 쟝지(張智) 등이 쟉년 윤십이월일의 흠봉셩지의 동이의 회 오직 조션(朝鮮)지칭이 아답고  그 오미 먼지라 가히 그 일홈을 본바드라 쳬텬목민야 영챵후라 나 불곡이 엇지 감히 경 삼으리오 실노 종녕의 무강지복이라 즁외의 파고야 더브러 경시고 금으로 고려(高麗) 국명을 졔고 조션(朝鮮)지호 준용라 이 초복을 당야 맛당이 관은을 뵈리니 기 홍무 이십뉵년(洪武 二十六年) 이월 십오일 샹 이젼의 이죄 이하 이발각 미발각 이결졍 미결졍을 함유졔지 감히 유지젼로 샹고도 이 기죄로 쇠지지라 오&희라...박시(朴氏)셕시(昔氏)김시(金氏) 서로 니어 신나(新羅)라 칭고 온조(溫祚) 졔(百濟)라 젼의 칭고 견훤(甄萱)은 졔(百濟)라 후의 칭고  고쥬몽(高朱蒙)은 고구려(高句麗)라 칭고 궁예(弓裔) 후고구려(後高句麗)라 칭고 왕시(王氏) 궁예(弓裔) 야 구려(句麗)지호 인습야 다  모흘 보젼야 즁국(中國)의 명을 밧지 아니고 스로 명호 셰워 서로 침탈니 비록 칭회 이시나 엇지 족히 리오 오직 긔(箕子)무왕(武王)의 명을 밧와 조션(朝鮮)후 봉니 금   텬 명야 샤 오직 조션(朝鮮) 지칭이 미고  그 오미 먼지라 쳬텬목민야 영챵후라 시니 대개 무왕(武王)이 긔(箕子) 명시던 바로   뎐하 명+신...

 


2007.5.29


kang.hwp
by Comte | 2007/05/29 23:57 | 역사 | 트랙백
신라의 慶州가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開平이라는 엉터리주장에 대해...

 

신라의 도읍지 경주가 지금의 하북성 唐山시의 開平[118-18E, 39-42N]이라는 엉터리주장이 있다.

또 다른 자는, 고려의 서경도 지금의 평양이 아니란다.

 

이 주장을 하는 자는 고려의 도읍이 한반도 開城이라는 데는 이의를 제기 않는다(못하는 것일 게다]

 

이 주장이 얼마나 헛소리인가 살펴본다...

地名만 비슷하거나 같으면 무조건 대륙의 어디에 엉겨붙이는 환빠의 습성이 어찌 하루이틀만의 일이겠는가!!!!...

 

1] 사료에서 고려의 개경과 서경, 남경간의 거리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았다.

 

고려사

의종 무자 22년(1168) - 이때의 도읍은 개경

3월 신미일[9/4.18]에 왕이 경명궁(慶明宮)으로 옮겨 앉았다.

정축일[15/4.24]에 왕이 서경(西京)에 갔다. 이때에 왕의 아우 익양후(翼陽侯)와 평량후(平凉侯)는 자못 여러 사람들의 인망이 있었는데 왕이 혹시 무슨 사변이 생길까 염려되어 서경에 옮겨 앉아 사변을 피하려는 것이었다.

경진일[18/4.27]에 왕이 평주(平州)의 숭수원(崇壽院) 서정(西亭)에 이르러 재상들과 시신들을 불러서 주연을 베풀고 남계(南溪)에 작은 배를 띄워 물을 따라 올라가면서 놀다가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임오일[20/4.29]에 황주 동선역(洞仙驛)에서 수레를 멈추고 벽파정(碧波亭)에서 연회를 차렸으며 또 남계(南溪)에 배를 띄워 밤이 되도록 연회를 베풀고 즐겼다. 이날 악공(樂工)과 모든 광대들에게 각각 백금 세 근씩 주었다.

을유일[23/5.2]에 왕이 서경에 도착하였다.

 

의종 기축 23년(1169) - 이때의 도읍은 개경

3월 기미일[3/4.1]에 왕이 서경(西京) 순행과 관련하여 친히 소문을 짓고 산호정(山呼亭)에서 나한(羅漢)에 재를 올렸다.

신유일[5/4.3]에 내전(內殿)에서 태일(太一), 11요(曜), 남두(南斗), 북두(北斗), 12궁(宮) 신(神)에 기도를 하였다.

을축일[9/4.7]에 왕이 서경으로 떠났다.

무진일[12/4.10]에 왕이 평주(平州)에 머물러서 숭수원(崇壽院) 남지(南池)에서 뱃놀이를 하였으며 이날 밤에는 수행한 관료들을 위하여 연회를 배설하였다.

을해일[19/4.17]에 왕이 서경에 도착했다.

기묘일[23/4.21]에 왕이 영명사(永明寺)에 가서 대동강에서 용선(龍船)을 타고 술을 마시며 놀다가 그 길로 부벽루에 올랐다.

경진일[24/4.22]에 왕이 구제궁(九梯宮)에 갔다.

임오일[26/4.24]에 왕이 영명사에서 배를 타고 홍복사(洪福寺)에 갔다가 거기서 곧추 인왕사(仁王寺)로 갔다.

계미일[27/4.25]에 왕이 팔경정(八景亭)에 가 수희(水戱)를 구경하였다.

을유일[29/4.27]에 왕이 서경을 출발하였다.

여름 4월 신묘일[5/5.3]에 기우제를 지냈다. 이때에 정월부터 이달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경자일[14/5.12]에 왕이 패강(浿江) 용서정(龍瑞亭)에 가서 술을 마시며 뱃놀이를 하였다.

계묘일[17/5.15]에 왕이 서울로 돌아와서 2죄(참형과 교형) 이하를 석방하였으며 조서를 내려 왕이 통과한 명산대천 신들에게 신호(神號)를 더 붙이고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 중한 폐질자, 의부(義夫), 절부(節婦), 효자(孝子), 순손(順孫)들에게 모두 물품을 주었으며 왕을 수행한 문무 관원들에게 차례에 따라 동정(同正) 직품을 주고 기타 잡무 인원들에게는 물품을 차등 있게 주었다.

 

 

고려사제58권

서경유수관

서경유수관 평양부(西京留守官平壤府)는 원래 3조선의 옛 서울인데 당요(唐堯) 무진(戊辰)년에 신인(神人)이 하늘로부터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 왔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삼고 평양에 도읍을 정하여 그를 단군(檀君)이라고 불렀으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며, 주나라 무왕(周武王)이 상나라(商)를 정복하고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며, 그 후 기자의 41대 손자인 준(準) 때에 연나라(燕) 사람 위만(衛滿)이 망명하여 와서 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 가지고 기준의 땅을 빼앗고 왕험성(王險城)〔험(險)은 검(儉)으로도 쓰는바 곧 평양이다.〕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이것이 위만 조선이다. 그의 손자 우거(右渠)가 중국 황제의 명령을 받들지 않으므로 한나라 무제(漢武帝) 원봉(元封) 2년에 군사를 보내 이를 치고 그 지역에 4개의 군(郡)을 설치하여 왕검을 낙랑군(樂浪郡)으로 만들었다.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15년에 국내성(國內城)으로부터 옮겨서 이곳에 수도를 정하였으며 보장왕 27년에 신라 문무왕이 당나라와 함께 고구려를 쳐서 멸망시키고 신라의 땅으로 하였다. 고려 태조 원년에 평양이 황폐하였으므로 염주, 백주, 황주, 해주, 봉주 등지의 백성들을 이주시키고 대도호부로 만들었다가 얼마 후 서경(西京)으로 하였고 광종 11년에 서도(西都)라고 불렀으며 성종 14년에 서경 유수(西京留守)라고 불렀다. 목종 원년에는 또 호경(鎬京)으로 고쳤고 문종 16년에 다시 서경유수관이라 하고 그 직할 하에 속하는 4개 도(道)를 설치하였으며 숙종 7년에 문반(文班), 무반(武班) 및 5부(五部)를 설치하였다. 인종 13년에 서경의 중 묘청(妙淸)과 유감 및 분사 시랑(分司侍郞) 조광(趙匡) 등이 반란을 일으며 절령 길을 차단하였으므로 원수 김부식(金富軾) 등은 명령을 받고 3군을 거느리고 가서 이를 진압하고 유수, 감군(監軍), 분사(分司), 어사(御史) 외의 관리를 전부 없앴으며 얼마 후에 그 직할 하에 있던 경기 4개 도를 없애고 그 곳에 6개의 현을 설치하였다. 원종 10년에 서북면병마사영(西北面兵馬使營) 기관(記官) 최탄(崔坦)과 삼화 교위(三和校尉) 이연령(李延齡) 등이 반란을 일으켜 유수를 죽이고 서경과 여러 성들을 가지고 몽고에 투항하는 반역 행위를 감행하였으며 몽고는 서경을 동녕부(東寧府)로 만들어 관리를 배치하고 자비령(慈悲嶺)으로써 경계를 삼았다. 충렬왕 16년에 원나라가 서경과 여러 성을 돌려 주었으므로 다시 서경

유수관으로 고쳤으며 공민왕 18년에 만호부를 두었고 후에 평양부로 고쳤다. 여기에는 대동강(大同江)〔즉 패강(浿江)을 말하는바 왕성강(王城江)이라고도 한다. 이 강의 하류는 궤진 약수로 되어 있다.〕, 대성산(大城山)〔구룡산(九龍山) 또는 노양산(魯陽山)이라고도 한다. 《문헌 통고(文獻通考)》에 “평양성 동북쪽에 노양산이 있다”고 한 것이 곧 이산을 가리킨 것이다. 산마루에 3개의 연못이 있다.〕, 2개의 옛 성터〔그 하나는 기자(箕子)때에 쌓은 것으로서 성안은 구역으로 구분하여 정전제(井田制)를 실시하였으며 다른 하나는 고려 성종 때에 쌓은 것이다.〕, 기자묘(箕子墓)〔부성(府城) 북쪽 토산(兎山) 위에 있다.〕, 동명왕묘(東明王墓)〔부 동남쪽 중화(中和)와의 접경인 용산곡(龍山谷)에 있는데 진주묘(眞珠墓)라고도 부른다. 또한 인리방(仁里坊)에는 그 사당이 있는데 고려에서는 계절 따라 왕의 신임장을 보내 제사를 지냈으며 매달 보름과 그믐에는 해당 관리에게 명령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 읍 백성들은 지금도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이곳에 와서 기도를 하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동명성제(東明聖帝)의 사당이라고 한다〕, 을밀대(乙密臺)〔금수산(錦繡山) 마루에 있는데 이 대 아래 층층이 쌓인 낭떠러지 곁에 영명사(永明寺)가 있는데 이곳이 곧 동명왕의 구제궁(九梯宮)이며 그 안에 기찬굴(麒贊窟)이 있고 굴 남쪽은 백은탄(白銀灘)이며 이곳에 바위가 있어 조수가 드나들므로 조천석(朝天石)이라고 한다.〕등이 있으며 소속현이 4개 있다.

강동현(江東縣)은 인종 14년에 경기를 나누어 6개의 현으로 만들 때 잉을사향(仍乙舍鄕), 반석촌(班石村), 박달곶촌(朴達串村) 및 마탄촌(馬難村)을 합쳐서 이 현을 만들었으며 현령을 두고 그대로 본 평양부의 소속현으로 하였다. 후에 성주(成州)에 소속시켰으며 공양왕 3년에 다시 현령을 두었다.

강서현(江西縣)은 인종 14년에 경기를 나누어 6개의 현으로 만들 때 이악(梨岳), 대구갑악(大垢甲岳), 각묘독촌(角墓禿村), 증산(甑山) 등의 향(鄕)을 합쳐서 이 현을 만들었으며 현령을 두고 그대로 본 부의 소속현으로 하였다.

중화현(中和縣)은 원래 고구려의 가화압(加火押)인데 신라 헌덕왕(憲德王)은 당악현(唐岳縣)으로 고쳤다. 고려에 와서 서경에 속한 촌으로 되었고 인종 14년에 경기를 나누어 6개의 현으로 만들 때 황곡(荒谷), 당악(唐岳), 소나무곶(松串) 등 9개의 촌을 합쳐서 이 현을 만들었으며 현령을 두고 그대로 본 부의 소속현으로 하였다. 충숙왕 9년에 태조가 전국을 합칠 때의 공신들인 김락(金樂), 김철(金哲)의 내향이라는 이유로 군으로 승격시켰으나 영(令)은 그대로 두었으며 공민왕 20년에 또다시 승격시켜 지도사(知郡事)로 하였다.

순화현(順和縣)은 인종 14년에 경기를 나누어 6개의 현으로 만들 때 추자도(楸子島), 앵천촌(櫻遷村), 용곤촌(龍坤村), 화산촌(禾山村) 등을 합쳐서 이 현을 만들었으며 현령을 두고 그대로 본부에 소속시켰다. 후에 상원(祥原)에 소속되었으며 충혜왕 2년에 삼화(三和)에 이속되었다.

 

신우 무진 14년(1388) - 이때의 도읍은 개경

[5월]기해일[26/6.30]. 신우가 평양에 도착하여 재물과 보물들을 수습하여 가지고 대동강(大同江)을 건너서 밤중에 중화군(中和郡)에 도착하였다.

신축일[28/7.2]. 신우가 도중에서 대군이 이미 가까이 따라왔다는 소식을 듣고 사잇길로 들어서서 빨리 달려서 기탄(岐灘)을 지나 아침에 서울에 도착하여 화원으로 들어갔는데 따라온 사람이 겨우 50여 명이었다. 그런데 서경에서 경성(京城)까지의 사이에서 신우를 시종하던 신료(臣僚)들이나 백성들이 술과 장(漿)을 가지고 대군을 마중하는 사람들이 연이어 끊어지지 않았다. 이에 최영이 반항을 하려고 백관들에게 무기를 들고 임금을 시위하라고 지시하였다.

 

고려사절요 제1권

태조 신성대왕 (太祖神聖大王)

을미 18년(935), 후당 청태 2년ㆍ거란 천현 10년 - 이때의 도읍은 개경

○ 11월 갑오일[3/12.2]에 신라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왕도를 출발하니, 사대부와 서민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향거(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 리에 이어지고, 길은 사람으로 꽉 차서 막혔으며, 구경꾼들이 죽 둘러 서 있었다. 길가에 있는 주ㆍ현에서는 접대가 매우 성대하였고, 왕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고 위로하였다.

○ 계묘일[12/12.10]에 신라왕이 왕철 등과 함께 개경에 들어오니, 왕이 의장(儀仗)을 갖추고 교외에 나가서 맞이하며 위로하고, 동궁(東宮)과 여러 재신(宰臣)에게 명하여 그를 호위하고 들어와서 유화궁(柳花宮)에 머무르게 하였다.

 

고려사절요 제4권

문종 인효대왕 1(文宗仁孝大王一)

계사 7년(1053), 송 황우 5년ㆍ거란 중희 22년 - 이때의 도읍은 개경

[10월]○ 을묘일[20/12.2]에 행차가 서경에서 떠나 대동강 누선을 타고 장군 정습(鄭習) 등 8명에게 명하여 활을 쏘게 하였는데 낭장 유현(惟現)의 화살이 강을 건너가니, 왕이 가상히 여겨 장려하고 드디어 여러 왕씨와 재추ㆍ시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 유수사(留守使) 왕이보(王夷甫) 등이 생양역(生陽驛)에 이르러 하직하니, 각각 공복 한 벌씩을 내려주었다.

○ 정사일[22/12.4]에 자비령(慈悲嶺) 미륵원(彌勒院)에 머물러 향을 올리고 의복을 보시하였으며, 행차가 절령(岊嶺)을 지나는데 길가에서 한 여자가 두 어린애를 안고 있는 것을 보고 왕이 불쌍히 여겨 쌀을 내려주었다.

○ 신유일[26/12.8]에 서경에서 떠난 행차가 서울에 이르렀다.

 

고려사절요 제16권

고종 안효대왕 3(高宗安孝大王三) - 광주, 남경, 강화는 인접한 곳이다

을미 22년(1235), 송 단평 2년ㆍ몽고 태종 7년

○ 가을 윤 7월에 몽고 군사가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를 침범하였다.

○ 전후좌우군의 진주(陣主)와 지병마사에게 명하여 연강(沿江)을 방비하게 하고, 또 광주(廣州)ㆍ남경(南京)은 합하여 강화로 들어가도록 하였다.

。○秋閏七月,蒙古兵,侵安邊都護府。○命前後左右軍,陣主,知兵馬事,沿江防戍,又令廣州,南京,合入江華。

 

고려사절요 제27권

공민왕 2(恭愍王二)

경자 9년(1360), 원 지정 20년

○ 가을 7월에 왕이 백악(白岳)에 거둥하여 도읍을 옮길 자리를 보았는데, 백악은 임진현(臨津縣) 북쪽 5리에 있다. 이전에 남경(南京)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전 한양윤(漢陽尹) 이안(李安)을 보내서 성과 대궐을 수리하게 하니, 백성들이 몹시 괴로워 하였다. 그래서 태묘에서 점을 쳤더니 불길하므로 도읍을 옮기지 않았는데, 이때 또 백악에서 역사를 시작하니, 당시 사람들이 신경(新京)이라 하였다. 재상들이 남경의 궁실을 헐고 백악으로 옮기려 하니, 양광도 안렴사 김일치(金一致)가 떠나면서 아뢰기를, “지금 남경의 궁실을 헐면, 백성들이 실망할까 하나이다." 하니, 왕이 놀라 이르기를, “나는 실상 알지 못하는데, 재상들이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하고, 헐지 말라고 명하였다.

○ 11월 신유일[8/12.16]에 왕이 백악의 새 궁으로 옮겼다.

 

고려사절요 제34권

공양왕 1(恭讓王一)

경오 2년(1390), 대명(大明) 홍무 23년 - 개경에서 남경으로 천도

[9월]○ 병오일[17/10.25]에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기고 판삼사사(判三司事) 안종원(安宗源)에게 명하여 송경(松京)에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경술일[21/10.29]에 어가(御駕)가 한양에 이르니 양광도 관찰사 유구(柳玽)가 화려한 가설무대를 짓고 온갖 놀이를 베풀어 맞이하므로, 왕이 먼저 사람을 보내어 이를 그만두게 한 후에야 들어갔다. 간관이 유구가 백성에게 조세를 과중하게 징수하여 왕에게 잘 보이려 한다고 구를 탄핵하여 파면시켰다

 

고려사절요 제35권

공양왕 2(恭讓王二)

신미 3년(1391), 대명 홍무 24년 - 남경에서 개경으로 환도

○ 2월 기미일[2/3.7]에 왕이 남경을 떠났다. 임술일[5/3.10]은 왕의 탄신일이므로 회암사(檜巖寺 경기 양주)에서 중에게 밥을 먹이고, 베 1천 2백 필을 주니, 정당문학 정도전이 간하기를, “탄일에 중에게 밥을 먹이는 일은 선왕의 전례(典禮)가 아니라 신자(臣子)의 정에서 나온 것일 뿐이며, 임금이 스스로 복을 빌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 정읍(井邑)의 백성 왕익부(王益富)는 지용기(池湧奇)의 아내와 재종 형제가 되는데, 용기의 집에 드나들면서 스스로, “충선왕의 서증손이다." 하였다. 정양군(定陽君) 우(瑀)가 이를 알고 고발하여 마침내 체포하여 국문한 다음 익부와 그 자손 13명을 교살하였다. 사헌부에서 소를 올려, 용기가 익부를 몰래 비호하여 반역을 도모했다고 논핵하고, 낭사에서도 극형에 처하기를 청하였다. 왕에게 총애 받는 중 신조(神照)는 평소부터 용기와 잘 지냈으므로, 왕에게 은밀히 아뢰기를, “전하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한 공은 오로지 용기에게 있습니다." 하니, 왕이 특별히 죄를 사면하였다. 사헌부에서 다시 용기를 목 베기를 청하니, 이에 곤장을 쳐서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었다.

○ 정묘일[10/3.15]에 왕이 서울로 돌아왔다.

。○二月己未,王發南京,壬戌,以誕辰,飯僧于檜巖寺,施布一千二百匹,政堂文學鄭道傳,諫曰,誕辰飯僧,非先王之典,出於臣子之情耳,未聞人君自行祈福,不聽。○井邑民王益富,與池湧奇妻,爲再從兄弟,出入湧奇家,自謂忠宣王孼曾孫,定陽君瑀,知之以告,遂捕鞫之,絞益富及子孫十三人,憲府,上疏,論湧奇,陰庇益富,潛謀不軌,郞舍,亦請置極刑,幸僧神照,素善湧奇,密白王曰,援立之功,專在湧奇,王特宥之,憲府,復請誅湧奇,乃杖流遠地。○丁卯,王還都。

 

고려사 권135

신우 3

신우 계해 9년(1383) - 한양에서 개경으로 환도

2월 무인일[4/3.8]. 신우가 활과 살을 차고 교외에서 말을 달렸으며 이튿날[5/3.9] 또 교외에서 사냥하였다.

중(僧) 혼수(混修)를 국사(國師)로 삼고 찬영(粲英)을 왕사(王師)로 삼았다.

신우가 양주(楊州)에서 물고기 잡는 것을 구경하였다.

신우가 한양을 출발하였다. 그때 군사와 백성들이 추운 밤을 한지에서 겪는 것이 너무나 괴로우므로 출발할 때 그 여막에 불을 질러 신우가 다시는 오지 말 것을 희망하였다.

양광도 안렴사 유극서(柳克恕)와 교주도 안렴사 최자(崔資)에게 내구(內廐)의 말을 1필씩 주었다. 그 두 사람은 모두 간사하고 아첨을 잘 하여 윗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어 주었다. 신우가 한양으로 갔을 때에 주민의 고혈을 긁어서 임금의 식찬을 극도로 사치스럽게 만들어 바치고 또 권세 있는 고관들에게 뇌물을 주어서 그들의 환심을 산 까닭에 상 준 것이다.

기축일[15/3.19]. 신우가 송경(松京)으로 돌아왔는데 재신(宰臣) 박원경(朴原鏡)의 집을 임시 거처할 궁으로 정하여 채색 장막을 돌려 치고 여러 가지 놀음을 벌여 놓고서 신우를 영접하였다. 또 성균관의 학생들로 가요(歌謠)를 바치게 하였더니 신우가 묻기를 “학생들이 왜 이처럼 적은가?”라고 하니 염흥방(廉興邦)이 대답하기를

“지난 때에는 양현고(養賢庫)가 풍족하여 능히 여러 학생들을 잘 양성할 수 있었으므로 사람마다 다투어 가며 입학하였으나 지금은 쌀 궤의 바닥이 긁히어 학생을 잘 양성할 수 없기 때문에 학생이 적습니다”라고 하였다.

신우가 말하기를

“그러면 풍저창(豊儲倉) 쌀을 주어서 학생들을 양성하라!”라고 말하였다.

신우가 여러 신하들을 화원에 불러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밤중이 되어서야 그만두었다.

 

고려사 권46

공양왕 2

공양왕 신미 3년(1391) - 한양에서 개경으로 천도

2월 초하루 무오일[3.6]에 회군(回軍) 1등 공신 이(태조)에게 토지 1백 결, 2등 전 시중 심덕부 등 17인에게 각각 50결, 3등 전 판 자혜부사(前判慈惠府事) 최단(崔鄲) 등 30인에게 30결씩을 주었다.

기미일[2/3.7]에 왕이 남경을 출발하여 신유일[4/3.9]에 회암사(檜巖寺)에 가서 머물면서 불사(佛事)를 크게 베풀었다. 온갖 사치를 다하였으며 중 1천여 명에게 음식을 주고 악관(樂官)을 시켜 향악(鄕樂)과 당악(唐樂)을 연주케 하였다. 왕이 손수 향로(香爐)를 쥐고 동서 승당(僧堂)을 돌아다니면서 음식을 권하였다. 순비(順妃)도 역시 그대로 하였다. 또 왕은 왕비와 세자와 함께 밤새도록 부처에게 절하였다.

임술일[5/3.10]에 왕과 세자가 손수 중들에게 베 1천 2백 필을 주고 강주 승(講主僧)에게는 비단과 명주 각 3필과 옷 한 벌을 주었다. 이어서 절 문에 나가 앉아서 조신들로부터 생신의 축하를 받았다.

정묘일[10/3.15]에 왕이 남경으로부터 돌아왔다. 서울 사람들이 채붕(綵棚)을 매고 맞이하였다.

 

※ 각지점간 거리(신증동국여지승람, 정상기의 東國地圖, 松都誌에서)

개성부 : 한양에서 166리(2일 거리)

경주부 : 한양에서 783리(9일 거리)

평양부 : 한양에서 582리(6일반 거리)

강화부 : 한양에서 135리(1일반 거리)

 

 

이상의 자료를 보면,

왕대

이동일자(양력/출발-도착)

이동지역

비고

신라 경순왕(935)

12.2-12.10

경주서 개경으로

만8일

문종(1053)

12.2-12.8

서경서 개경으로

만6일

의종(1168)

4.24-5.2

개경서 서경으로

만8일

의종(1169)

4.7-4.17

 

개경서 서경으로

만10일

의종(1169)

4.27-5.15

서경서 개경으로

만18일

우왕(1383)

3.9-3.19

남경서 개경으로

만10일

우왕(1388)

6.30-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