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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古代天象記錄總集을 보다 보니, 월식부분의 不確定類에서 다음 기록이 보였다(p.147) 後漢順帝陽嘉年間月食旣于端門[後漢書 李固傳] 월식의 일자를 특정짓지 못하겠다는 의미인데, 조금 무성의해 보인다. 이 월식의 구체적 날짜를 계산해보았다. 우선 기본적으로 다음 자료가 필요하다. 陽嘉 : 서력 132-135년 당시의 수도 洛陽 : 112.5E, 34.7N, 해발 120m 端門 : 太微垣南藩二星,東曰左執法,西曰右執法,左、右執法之間叫“端門”,爲太微垣的南門。《後漢書·李固傳》:“加近者月食既於端門之側。” 李賢 注:“端門, 太微宮 南門也。”《晉書·天文志上》:“太微,天子庭也……南蕃中二星間曰端門。” 左執法 : η Vir 右執法 : β Vir 이제 계산을 해보기로 하자. 서력 131-136년간의 월식 : 총9회중 개기월식은 3회[Occult 4.0.6] ① 131.1.1 : 부분월식 ② 131.6.28 : 부분월식 ③ 132.11.11 : 부분월식 ④ 133.5.6 : 개기월식 ⑤ 133.10.31 : 개기월식 ⑥ 134.4.26 : 개기월식 ⑦ 134.10.20 : 부분월식 ⑧ 136.3.6 : 부분월식 ⑨ 136.8.29 : 부분월식 이중, 개기월식인 것만 추려보면, ④ 133.5.6 : 개기월식. UT로 월식시간 19:00-22:32[개기시간 20:26-21:05] ⑤ 133.10.31 : 개기월식. UT로 월식시간 10:52-14:28[개기시간 11:53-13:27] ⑥ 134.4.26 : 개기월식. UT로 월식시간 01:42-05:10의 3회가 있다. 낙양에서 월출입시간(UT) : 달의 윗변기준 ④ 133.5.6 : 10:50-21:36 => 월식 보임(月入帶蝕) ⑤ 133.10.31 : 09:31-23:24 => 월식 보임 ⑥ 134.4.26 : 11:23-22:22 => 달뜨기前으로 월식 안보임 따라서 위 기록은 133년의 월식인 것 같으나, 구체적인 것을 특정하기 위해서는 端門之側이란 부분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stellarium 0.10.2/ Skymap pro 11.0.6을 돌려보니, ④ 133.5.6 : 달은 개기월식시에 전갈좌(Sco)에 있음. 전갈좌는 처녀좌(Vir)의 남측에 있음 ⑤ 133.10.31 : 달은 개기월식시에 황소좌(Tau)에 있음 따라서, 위 기록은, 133.5.6/지방평균시로는 133.5.7/의 월식기록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133.5.7은 陽嘉2년 음 3.16 丙辰일이다[張培瑜-3500年曆日天象] 퇴근길 18시. 잽싸게 출발했지만 역시 사람 생각은 비슷한 모양... 길 무지하게 막히기 시작한다. 차 없을 때는 5분이면 가는 거리이지만 차가 막히니 미리 우회전 차선에서 줄서서 車線따라 들어간다. 오늘도 파리같은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누구 새치기[끼어들기는 점잖은 표현이리라]할 줄 몰라 안하는 줄 아나??? 하나 있는 우회전 차선에서 쭉 줄서서 순서대로 들어가는 우리를 비웃듯이, ㄸ파리 같은 족속들은 옆 차선으로 저 앞으로 들어가 새치기를 시도한다. 15분, 20분 넘게 걸려 정상차선으로 우회전해 들어가는 우리만 병진이다... 이런 족속들을 모조리 사살하면 인구도 조절되고 공해도 줄고, 에너지도 절감될 텐데.... 힘들게 들어가니 다시 차선이 하나로 줄어든다는 표시가 보인다... 좌측으로 깜박이 넣고 순서대로 진입하는 데, 역시나 우측으로 쓩하고 앞으로 나가 좌측으로 새치기 해 들어오려는 파리같은 놈들이 보인다.. 분명히 우측노면에 차선 줄어든다는 예고표지가 있는 데도 불구하고 저만 빨리 편하게 가려는 이런 벌레 같은 놈들은 모조리 撲滅해야 한다. 경찰서에 민원넣어도 흉내만 낼 뿐 그만이다. 도대체 범죄자는 왜 감옥에 집어 넣는 지 모르겠다. 없애버리면 버러지에게 주는 식량도 절약되고 국가예산도 낭비되지않을 것인데... 음모론인지 모르지만, [국가는] 자기들의 존재가치를 부각시키고 당위성을 홍보하기 위해 범죄자를 살려두는 것 같다... 주기적으로 잡아 넣었다 풀어줬다의 반복... 하긴 범죄가 없으면, 경찰의 존재가치는 없어질 것이 아닌가???? 위의 예는 하찮은 것이니 대충 살아야 할 지도 모르지만 막상 본인이 당해봐라... 지키기 쉬운 법은 그 처벌이 더욱 엄중해야 하는 데, 이것도 저것도 아니니 열심히 법지키며 살아야 할 當爲性을 느끼지 못하겠다... 주차금지구역은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 정한 것인데, 대충 깜박이 켜 놓고 번호판 가려놓고 제 볼 일[담배 사거나 음료수 사기] 보러 가는 놈의 차는 폐차를 시켜버리거나 끌고 가도 괜찮게 했으면.... 룸살롱이나 바에 가서 술값으로 몇십만원 쓰는 건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바로 옆에 있는 기본 1,000원의 유료주차장에는 기를 쓰고 차를 대지않고 무단주차하는 것들... 저만 살겠다고 이웃에 피해를 주던 말던 소음과 악취와 공해를 유발시키는 것들.. 모조리 분해시켰으면 좋겠다.. 누가 그러던데, 한반도의 적정인구가 2,000만이라는 데, 神도 불량품을 量産하는 일에 지쳤는가 보다... 남의 눈에 피눈물나게 한 것들은 당연히 응분의 형벌을 가해야하는 게 합당하지 않을까?? 죄는 미워해도 인간은 미워하지말라는 말은 헛소리.. 죄를 저지르는 것이 인간인데 그걸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는 일... 죽어 마땅한 자를 감옥에 넣어 국가예산을 낭비하는 것도 모순이리라. 떡고물을 보고 그런 짓을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자들은 피해자나 그 가족에게 넘겨 마음대로 처벌하게 해야하지 않을까???? 인간은 여하간 천성적으로 邪惡한 존재이구나...
요새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보니 정말 x판같다.
사람 죽인 년[예의를 갖출 필요조차 없지않을까해서]이 1년반 징역밖에 안 살질 않나... 법대로 안되니 억지 깽판 지기다가 뒈진 놈들을 열사로 추앙하지 않나.. 미국 쇠고기때는 촛불집회다 뭐다 x지랄 떨던 족속들은 요새는 조용하고... 흉악범에게도 인권이 있다고, 보호해야한다고 거품무는 놈들은 지가 당해 보아야 한다, 그 인간쓰레기들에게는 인권이 있었는 지는 몰라도 그 죄를 저지른 순간 스스로 인권을 포기한 것이다. 이런 놈들을 즉각 해체해서 장기를 매각하여 피해자들에게 보상하지않고 인권, 죄는 미워도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식의 거짓말로 대중을 호도하여 교도소에 넣어두면 그 놈 먹여살리는 비용은 인권운운하는 놈들만이 부담해야 하는 게 아닌가??? 쓰레기는 한 곳에 쌓아둔다고 해서, 걸레를 빨아도 행주가 안되듯이, 악취만 풍기는 쓸모없는 것일 뿐이다. 군필자 가산점에 x거품 무는 족속들은 왜이리 많은가.. 떫으면 저도 군대 다녀오면 되잖아... 누가 안가라고 막던????? 장애인들에 대해서는 별도의 우대정책이 있지않나??? 범법자가 아니면 아예 공무원, 그것도 상위직은 꿈도 못꾸겠군.. 정말 2년 2개월 22일간 뺑뻉이 돌고 사회에 나오니 들어가는 직장마다-그것도 꽤 괜찮다고 생각되는 정부출연기관과 금융기관- 왜 그리 방위출신은 많은지... 신체는 나보다 더 건강하고 허우대도 멀쩡하던 놈들이 어떻게 방위만 하고 놀고 있는지 정말 의아했다만 세상살아가면서 조금씩 그 의문이 풀리더라. 돈 없고 빽없이 곧이곧대로 법만 지키며 살아온 우리들만 병신이었다고 느껴지는 건 비단 나만의 착각인가??? 방송에 나오는 놈들은 상당수가 병역 면제아니면 방위군. 노래-아마 립싱크겠지만-하는 놈들 춤출땐 펄펄나는구만 디스크로 병역면제나 보충역이란다... 2 x 9..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에 보니, 고려(高麗) 군기감사(軍器監司) 채공(蔡公) 묘지명이 보인다. 내용은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593 에 있는 데, 의문이 생긴다. 이 묘지명은 연대 미상으로 분류되어 있다. 인천채씨 족보에 의하면, 시조 채선무 – 신징 – 보문 – 영년 – 중서 – 규 – 환 - 윤신으로 이어진다. 이 중 채보문은 고려 의종[1146-1170]때 사람이므로 이로 미루어 보면, 채환은 약 120년후인 13세기말 고려 충렬왕무렵의 사람이 아닌가 한다. 그의 관직이 門下侍中에 이르렀다하지만 고려사에 기록이 없다는 것은 의아스럽다. 고대에도 자기 과장적 버릇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감히 최고관직인 문하시중을 사칭할 수 있었을까??? 문하시중이란 명칭은 1275년에 첨의중찬으로 바뀌므로 그 이전무렵에서 채환이 문하시중을 역임했다는 얘기인 데, 글쎄...... 아직도 이 개념으로 우려먹는 병진들이 있는 모양이다.
인터넷에 올라온 조선일보 기사중 다음 대목이 눈에 들어옵니다. “ ...정부가 임진강에서 북한의 황강댐 무단 방류에 대비해 건설 중인 '군남홍수조절댐'은 북한의 눈치를 보느라 적정 규모보다 작게 짓고 있는 것으로 8일 확인됐다. 국토해양부 관계자는 "북한의 무단방류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규모로 군남댐을 지어 최대 규모로 담수하면 북한 지역 일부가 잠길 수 있어 현재 규모로 결정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임진강 유역의 군남댐 건설 계획이 수립된 것은 2002년 하반기.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2년 12월 북한이 황강댐을 3억~4억t 규모로 건설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군남댐 규모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러나 댐 규모를 늘리기 위해 댐 높이를 당초 계획된 26m에서 4~5m가량이라도 높이면 북측 지역 일부가 잠길 수 있다는 이유로 이 주장은 묵살됐다.... 군남댐과는 달리 북한강 유역의 평화의댐은 북측의 금강산댐보다 더 큰 규모로 지었다. 1986년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에 대응하기 위해 1989년 건설된 평화의댐은 저수용량 5억9000만t 규모였다. 한때 '대(對)국민 사기극'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2002년 북한이 금강산댐을 증축하고 댐 붕괴 가능성까지 제기되자 정부는 평화의 댐을 증축했다. 현재 평화의 댐 저수용량은 북한 금강산댐(26억2400만t)보다 600만t가량이 큰 26억3000만t이다...“ [2009.9.9자 기사에서] 전두환시절에는 금강산댐보다 더 크게 지었지만 최근에 죽은 사람이 대통령인 시절에는 북한지역 일부가 물에 잠길 수 있어 조그맣게 지었다... 참 씁쓸하구나.. 누구를 위한 행위였는 지 ... 여담이지만, 어디서 불법행위로 개지랄하다가 6명정도가 죽은 것은 ‘참사’고, 빨갱이들의 지랄로 6사람이 아무 영문도 죄도 없이 운명을 달리한 것은 임진강 수난사고라.... 시사문제에는 관여하기 싫지만 명백히 싫은 것은 싫은 것이다... “저는 일생에 거짓말 한 일이 없습니다. 저는 거짓말 한 일이 없어요. 이것은 약속을 못지킨 것이지 거짓말 한 것은 아닙니다. 거짓말 한 것 하고 약속했다가 못지킨 것 하고는 다릅니다.”(관훈클럽. 1997.10.8) 물론 글자는 틀리지만, 약속을 못지키면 곧 거짓말이 되는 것이 아닌가??? 정계은퇴를 선언하고서는 다시 컴백하거나, 대통령 직선제가 되면 대통령 선거에 절대로 나오지 않겠다고 공언한 자. 대통령이 되면 무재산 가족이 될 것이라더니... 입만 떼면 거짓말 이더라... 난 정말 그 인간이 무지 싫다. 조국을 지키려고 서해해전에서 장병들이 순국했을 때 일본으로 축구구경 가다...
삼성 디카 WB550을 샀습니다.
4번째로 구입한 디카입니다. 올림푸스 sp-565uz, 올림푸스 뮤-9000을 놓고 몹시 망설이다가 삼성으로 홀린 듯 샀습니다. 565는 너무 무겁고 동영상이 거의 안된다는 (40초밖에!) 단점, 뮤-9000은 일반 sd 못쓰고 어댑터 끼워넣어야 하고 28mm광각에다 동영상이 640/480해상도라 하길래 홀린 듯 삼성것을 샀습니다. 렌즈밝기가 3.3이라 조금 어둡지 않을까 했습니다만 예상외로 잘 나오더군요. 익히 듣던 대로 실내사진은 별로 입니다만 그건 왠만한 디카도 마찬가지 아닌가 합니다. 딱 하루 써보니 여기저기서 읽어본 얘기가 이해가 되더군요. 1. 24mm 광각이라 주변부가 왜곡되어 찍히는 것 맞습니다. 2. 10배광학줌이라지만 24mm기준240mm까지이니, 일반적인 광학줌으로 계산하면 240/38 = 약 6.3배 광학줌이라 보면 딱 맞겠네요. 3. 스마트오토로 놓고 사진을 찍으니 ,얘가 뭔가 계산을 한참하는 듯 모드 선택에 시간이 들어 셔터를 눌러도 바로 찍히지 않는 경우가 보입니다. 그래서 그냥 오토모드로 찍고 있습니다. 4. 크기는 별로 안되지만 카메라를 잡을 때 엄지쪽이 자동으로 메뉴키 있는 곳에 가게되어 실수로 누르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합니다. 배치가 별로인듯.. 5. 실외에서 사진은 밝게 잘나옵니다. 물론 저번의 후지 z100fd기준비교입니다만.... 10M 초고화질로 놓은 영향인지 화질도 좋습니다. 日食계산한다고 힘써거나 여기저기 돌아다닐 필요가 없겠습니다.
천자문(千字文)이란? 한문(漢文) 초학자를 위한 교과서 겸 습자교본. 1권. 중국 남조(南朝) 양(梁)의 주흥사(周興嗣:470?∼521)가 글을 짓고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의 필적 중에서 해당되는 글자를 모아 만들었다고 하며 사언고시(四言古詩) 250구(句), 합해서 1,000자가 각각 다른 글자로 되어 있다. 내용은 ‘천지현황(天地玄黃)’에서 시작하여 ‘언재호야(焉哉乎也)’로 끝난다. 당나라 이후 급격히 보급되어 많은 서가(書家)에 의하여 쓰여졌으며 그 중에서도 습자교본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왕희지의 7대손 지영(智永)이 진서(眞書:楷書)와 초서(草書)의 두 체로 쓴 《진초천자문(眞草千字文)》 본으로 1109년에 새긴 석각(石刻)이 전하고 있다. 송대(宋代) 이후 이용범위가 점점 확대되어 《천자문》의 순서를 이용하여 문서 등의 번호를 붙이는 습관도 생기고 또 《속천자문》이 나오는가 하면 전연 딴 글자를 뽑아 《서고천자문(敍古千字文)》이라 이름붙인 종류도 많이 나왔다. 이 책이 한국에 전해진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백제 때 왕인(王仁)이 《논어(論語)》 10권과 함께 이 책 1권을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보다 훨씬 전에 들어온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한문의 입문서로서 초보자에게는 필수의 교과서로 중용(重用)되었으며 선조 때의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쓴 《석봉천자문》은 유명하다. =============================================================== 히라가나 ‘る’와 비슷한 글자가 실록에 보인다고 일제의 조작 운운하는 가소로운 소리가 보인다. 무식하면 용감하고 편협된 사고를 가지고 사물을 보면 그리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 모르면 조금만 찾아보면 될 것을 왠 호들갑..... 집 서가에 있는 금성교과서 주식회사의 1994년판 뉴에이스漢韓辭典(인터넷 덕분에 안보던 종이사전을 오랜만에 펼치게 되는 구나).. 1939쪽의 眞草千字文을 보니 이 글자는 事의 초서임이 분명하다. 국회도서관 사이트를 검색하면, 조선시대 고문서의 초서체 연구 /심영환의 박사학위논문을 읽을 수 있는 데 상세한 내용은 직접 보시고, 그 275쪽을 보면, ![]() 잘 보이재?????????? 실록이 조작되었다는 헛소리에 맞장구치는 놈들을 도대체 무얼까??? 편협되고 왜곡된 시선으로 무슨 진실을 찾겠다는 건지.... 伽倻史 연표 가야의 역사에 대해 항상 감질났었습니다. 부여도 그렇지만 가까운(여기는 대구입니다) 곳에 장구한 세월동안 존재했었던 왕국의 역사가 거의 망각되어 버린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저번 주에 드디어 심당전서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檀書大綱의 기록속에서 가야관련기록을 찾아 연표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상당부분 가락국기를 참조한 것으로 보이나 삼국유사에 보이지 않는 내용도 다수가 있어 흥미가 생깁니다. 특히, 김수로왕의 탄생관련 기록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허황된 얘기가 아닌 현실적인 기술이 보여, 나름대로 이 기록을 믿고 싶기도 합니다. 서력년대순으로 관련 기록을 발췌하고 原註는 괄호속에 명시하였습니다.
或者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다음 기록을 문제로 삼고 있다. <해남현 : 두륜산頭輪山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이 산에 오르면 濟州의 漢拏山과 서로 바라보인다. 此山則與濟州漢拏山相望 ...>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7권 /전라도(全羅道) /해남현(海南縣) / 산천/ 위의 원문의 각주는 정확히는 頭輪山[在縣南三十里登此山則與濟州漢拏山相望]이다. 과연 그럴까??? [전남 해남군 삼산면 두륜산] 126-38-14E, 34-28-19N 높이 703m [한라산, 높이 1950m] 126-31-46E, 33-21-42N 양자간 직선거리 123km 특정고도에서 보이는 지평선까지의 거리는 다음의 간단한 기하학적인 算式에서 얻을 수 있다. Ds = sqrt(h(2r + h)) 여기서 Ds = 지평선까지의 거리, h = 관측자의 눈의 海拔, r = 지구의 半徑 이 것은 기하학적인 계산에 의한 식으로, 실제로는 大氣差를 고려하면 다음과 같다. (http://mintaka.sdsu.edu/GF/explain/atmos_refr/horizon.html참조) Ds = 3.86 sqrt(h) (km, h는 m 단위) 이제 계산을 해보자. 두륜산의 높이는 703m 이니 눈의 높이를 2m라 하더라도 h = 705이니 지평선(수평선)까지의 거리는 95km, 대기차를 고려하더라도 102km이니 123km 거리의 한라산이 안보일 듯하다. 그러나 한라산은 지표상에 붙어 있는 평지가 아니다. 한라산의 높이 1950m를 생각하면, 한라산 정상에서 보이는 지평선까지의 거리는 171km에 이른다. 두륜산과 한라산사이에 한라산보다 높은 장애물은 없으니 한라산에서 두류산을 보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은 관측자의 시력과 기상상태밖에 없을 것이다. 맑은 날(지금같은 대기오염이 없었던 그 500여년전의 시대에) 두륜산에서 한라산이 보이지 않았다면 관측자는 엉뚱한 곳을 보고 있는 게 아니었을까 ??? ㅋ ㅋ ㅋ 모 사이트에 대륙조선을 신봉하는 병진들에게 반론을 제기하시는 분이 있지만 글쎄, 당초에 이성이 있는 자들이라면 진작에 깨달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예전에는 병진들을 직접 상대했었지만 ‘복구불능- 수리불가능’이란 답을 얻고나서는 포기했습니다. 아래 기록에 대해서 병진들은 알고나 있으려나.... 문득 깨닫고 난 후에 자기 뒤를 돌아보면 얼마나 참회스러울까???...... ================================================================= ○ 봄 정월에 유청신ㆍ오잠이 원 나라에 글을 올려, 우리나라에 성(省)을 설립하여 원 나라의 내지와 같게 하기를 청하였다... 도첨의사사 이제현이 원 나라에 있으면서 글을 도당(都堂)에 올리기를, “적이 생각하건대, 우리나라의 시조 왕씨가 나라를 개창한 이래로 무릇 4백여 년이 되었습니다. 성조(聖朝)에 신하로 복종하여 해마다 공물(貢物)을 바친 것도 백여 년이 되었으니, 백성에게 베푼 은덕이 깊지 않다고 할 수 없으며, 원 나라 조정에 대한 공로가 두텁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지난 무인년(1218, 고종 5년)에는 요(遼)의 유얼(甹孽 남아 있는 천한 종자)로 금산왕자(金山王子)라고 불리는 자가 있어서, 중원(中原)의 백성을 노략하여 몰다가 동쪽으로 도서(島嶼)에 들어와 제멋대로 날뛰니, 태조성무황제(太祖聖武皇帝)께서 합진[哈眞]ㆍ찰라(扎剌) 두 원수(元帥)를 보내어 토벌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하늘에서 큰 눈이 와서 식물(食物)과 군량이 통운(通運)되지 못하자 우리나라의 충헌왕(忠憲王 원(元)이 추시한 고종(高宗)의 시호)은 조충(趙冲)ㆍ김취려(金就礪)에게 명하여 물자와 군량을 공급하고, 부기를 원조하여 미친 적당을 사로잡았는데 신속하기가 대나무가 쪼개지는 것 같은 기세였습니다. 그리고 두 원수는 조충 등과 형제가 되어 만세(萬世)토록 길이 잊지 않기로 맹세하였습니다. 또 기미년에는 세조황제가 강남(江南)에서 송 나라를 치고 회군(回軍)할 때, 우리 충경왕(忠敬王 원종(元宗))은 천명(天命)의 돌아감과 인심(人心)의 복종하는 바를 알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5천여 리를 가서 양(梁)ㆍ초(楚)의 들에서 맞아 뵈었으며, 충렬왕도 몸소 조현(朝見)의 예를 닦아 일찍이 조금도 게을리함이 없었습니다. 일본을 정벌할 때에는 우리의 병력을 모두 출동시켜 전봉(前鋒)이 되었으며, 합단(哈丹)을 쫓아 토벌할 때에는 관군을 도와서 적의 괴수를 무찔러 죽였습니다. 황실(皇室)을 위하여 바친 공로는 낱낱이 다 거론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주를 하가(下嫁)시켜 대대로 구생(舅甥)의 정의를 두텁게 하도록 하고, 〈우리나라 고유의〉 옛 풍속을 고치지 않고 종묘와 사직을 보전하게 하였으니, 세조황제 조서[詔] 덕택입니다. 이제 듣건대, 조정에서는 우리나라에 행성(行省)을 설립하여 다른 성(省)들과 같이 하려고 의논한다 하니, 과연 그러하다면, 우리나라의 공로는 일단 논하지 않더라도 세조의 조서는 어찌하렵니까. 엎드려 연전 11월에 새로 내린 조서의 조목(條目)을 읽어 보니, '사(邪)와 정(正)을 분별하여 천하를 태평하게 다스려서 중통(中統 세조의 연호)ㆍ지원(至元 세조의 연호)의 정치를 회복한다' 하였습니다. 성상(聖上)께서 이 덕음(德音)을 발표한 것은 실로 천하사해(天下四海)의 복입니다. 유독 우리나라의 일에 대해서만 세조의 조서를 본받지 않는 것이 옳겠습니까. 이제 까닭 없이 조그마한 나라의 4백 년의 왕업을 하루아침에 끊게 하여, 사직에 주인이 없고 종묘에는 제사가 끊어지게 한다는 것은, 사리로써 판단하여 보면 마땅한 처사가 아닙니다. 다시 생각하건대, 우리나라는 땅이 천 리를 넘지 못합니다. 게다가 산림과 내와 큰 늪 같은 쓸모없는 땅이 10분의 7입니다. 그 땅에서 세를 받더라도 조운의 비용도 되지 않으며, 백성에게서 거둔다 하더라도 녹봉(祿俸)도 지출하지 못할 것이니 조정의 세계(歲計)에서 본다면 구우일모(九牛一毛)일 뿐입니다. 더욱이 땅은 멀고 백성은 어리석으며, 언어가 상국과 같지 않아서, 숭상하는 것이 중국과 아주 다릅니다. 아마 이 소문이 들리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일으킬 것이니, 집집마다 찾아가 효유하여 안정시킬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리고 왜국(倭國)의 백성들과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로 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듣는다면, 바로 우리를 경계로 여기어, 스스로 전일에 원 나라에 반항한 것이 잘된 계책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집사(執事)께서는 세조께서 고려의 공(功)을 생각하던 뜻을 좇아서, 나라를 나라대로, 사람을 사람대로 두어 그 정치와 부세(賦稅)를 닦게 하고, 번리(藩籬)로 삼아서 우리의 무궁한 아름다움을 받들게 하소서." 하였다. 성을 설립하자는 논의가 드디어 그치었다. ○ 최성지ㆍ이제현이 원 나라에 있으면서 원 나라의 낭중(郞中)에게 글을 올리기를, “간절히 생각건대, 소방이 사대한 지 백 년이 넘었습니다만, 해마다 직공(職貢)의 예를 게을리한 적이 없었습니다. 옛날 요 나라 백성의 남은 종자(種子)인 금산왕자(金山王子)라는 자가 중원(中原)의 백성들을 노략해 몰고 와서 섬에서 반란을 일으켜서, 조정에서, 합진(哈眞)ㆍ찰라(扎剌)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할 때에, 날씨는 춥고 눈은 높이 쌓여서 군량을 수송하는 길이 끊어져 군사가 전진할 수 없게 되어서 흉도들의 웃음거리가 될 뻔하였는데, 우리 충헌왕(忠憲王)이 배신(陪臣) 조충(趙冲)ㆍ김취려(金就礪)에게 명하여 군량을 실어 가서 군사를 구제하여 원 군사가 우리 군사와 협공(挾攻)하여 멸하였으며, 두 나라의 장수는 서로 형제되기를 언약하고 영원히 잊지 않기로 맹세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태조 황제 때에 진력한 일입니다. 또 세조 황제께서 남정(南征) 중에 회군하여 장차 대통(大統)을 계승하려 할 때, 그의 아우가 삭방(朔方)에서 변란을 선동하니, 제후(諸侯)들이 근심하고 의심하였으며, 길이 매우 험조(險阻)하였으나 우리 충경왕(忠敬王)이 세자(世子)로서 신하를 거느리고 양(梁)ㆍ초(楚)의 들에서 절하고 맞이하니, 천하(天下) 사람들이 먼 곳(고려)까지 진심으로 복종하는 것을 보고, 천명(天命)이 세조에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가 세조 황제에게 충성을 다한 것이었습니다. 충경왕이 왕위를 이어받고 본국으로 돌아오니, 충렬왕(忠烈王)이 다시 세자(世子)로서 들어가 황제를 곁에서 모시었습니다. 세조 황제가 그 공로를 생각하고 그 의리를 가상히 여겨서 공주(公主)에게 장가들게 하여 특별한 은혜를 베풀고 여러 번 조칙을 반포하여 고려의 옛 습속을 고치지 말라고 하니, 온 천하가 미담(美談)으로 칭송하였습니다. 우리 노심왕(老瀋王 충선왕(忠宣王))은 바로 공주의 아들이요, 세조의 친외손입니다. 세조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줄곧 5조(朝)에 벼슬하니, 친척이며 또 훈구(勳舊)입니다. 다만 공을 이룬 뒤에 정치에서 물러나지 않다가 예기치 않은 변을 만나, 머리를 깎이고 옷을 바꿔 입고 멀리 토번(吐蕃)의 땅으로 귀양가게 되었으니, 고국과 만 리도 넘는 거리입니다. 깎아지른 벼랑과 몹시 험한 길을 열 걸음에 아홉 번은 비틀거리고, 추운 곳을 지날 때는 층(層)을 이룬 빙판과 쌓인 눈이 1년 내내 변함이 없고, 열대 지방을 지날 때는 독한 남기와 장기(瘴氣)가 축축이 끼어 찌는 듯이 덥고, 도적들은 일어나니 가죽배로 대하(大河)를 건너며 소외양간에서 야숙(野宿)해야 했습니다. 이같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반 년 만에 이제 그 지역에 이르렀습니다. 보릿가루를 먹으며 흙방에서 거처하니 신산(辛酸)하고 괴로운 갖가지 형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길 가는 사람들도 듣고 오히려 원통해하거든 하물며 그에게 신하로서 몸을 바친 자야 오죽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저는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모르며, 누웠다간 다시 일어나 마음이 초조해지고 다급하여 끊임없이 피눈물을 흘립니다. 대체로 먼 속국을 회유하고 친척과 돈목(敦睦)하는 것은 선왕(先王)의 정치이며, 공(功)으로 허물을 덮어 주는 것은 춘추(春秋)의 법(法)입니다. 족하(足下)는 왜 조용히 승상(丞相)에게 말하며, 노 심왕이 지난날 다른 뜻이 없었고, 오늘날 회개(悔改)하고 있으며, 여러 대의 충근(忠勤)을 저버릴 수 없고, 본국 사람들의 사모하는 마음을 막을 수도 없으며, 세조(世祖)의 폐부친속(肺腑親屬)을 잊어 버릴 수 없다는 것을 밝혀서, 들어가 황제에게 아뢰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금계(金鷄)의 은택(恩澤)을 내려 환(環)을 주어서 동으로 돌아와 다시 하늘의 해를 보게 하고, 성스러운 천자의 세상에서 홀로 구석을 향하여 우는 이가 없도록 하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면 대승상(大丞相)의 아름다운 덕은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더욱 드러날 것이며, 천하 사람들이 모두 족하(足下)를 칭송할 것입니다. 어찌 우리나라 군신들이 살에 새기고 뼈에 새겨 그 은혜의 만 분의 일이라도 갚기를 꾀하는 데 정도에서 그치겠습니까." 하였다. 또 승상 배주(拜住)에게 글을 올리기를, “지난해에, 천자께서 진노하셔서 우리 노심왕이 몸둘 바를 모르니, 집사(執事)께서 가엾게 여기어 천둥과 번개 같은 진노 밑에서 죽은 이를 살려내듯 백골에도 살을 붙이듯 하여, 가벼운 법을 좇아서 용서하여 먼 곳으로 귀양보내게 하였으니 다시 살려 주신 은혜는 부모보다도 더합니다. 그러나 그 곳이 매우 멀고 또 궁벽하여 언어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며, 풍토와 기후는 아주 다릅니다. 불의에 일어나는 도적떼와 닥쳐오는 굶주림과 목마름에 몸은 여위고 머리털은 모두 희어졌습니다. 신고(辛苦)의 상태는 말만 하여도 눈물이 흐릅니다. 그 친속 관계를 말하면 세조의 친외손이며, 그 공을 말하면 선제(先帝)의 공신입니다. 또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국가가 처음 용흥(龍興)할 때부터 의(義)를 사모하여 남보다 먼저 복종하여, 대대로 충성을 바쳐 온 공이 있습니다. 경전(經傳)에 이른 바, '오히려 10대에 걸쳐서도 죄를 용서하여 줄 만한 자' 입니다. 쫓기어 귀양간 이래 4년이 되었습니다. 마음을 고 치고 허물을 많이 뉘우쳤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집사(執事)께서는 처음에도 힘을 다하여 구출하였으니, 끝까지 은혜를 베풀 것을 잊지 말으시고, 천자에게 정상(情狀)을 거듭 자세히 아뢰어서 두터운 은혜를 내리도록 유도하여 주소서."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 고려사절요 제24권 충숙왕(忠肅王) 계해 10년, 원 지치 3년 이 때는 서력 1323년이야... 요지는 이거야.. 정월에 간신인 유청신, 오잠이 고려를 원의 한 省으로 편입시켜 줄 것을 元帝에게 요청하자 이제현이 글을 올려 사정(?)하여 중지시킨 내용이지. [물론 이제현 혼자의 공은 아니고 원의 왕관의 반대등도 있었지만..] 내용중에 보면 고려의 땅은 천리를 넘지못하고 , 게다가 7/10은 쓸모없는 땅이니 드셔봐야(?) 별 영양가가 없으니 그냥 내버려 두어주십사하는 내용이야. 원문은, 更念小邦,地不過千里,山林川藪,無用之地,十分而七. 加以地遠民愚,言語與上國不同,趨舍與中華絶異 與倭民,濱海相望 병진들아 아직도 대륙고려가 보이냐.???? ※ 왕관(王觀)의 글에서.../ ...본국은 경사(京師 연경(燕京))에서 거리가 수천 리나 떨어진 먼 곳입니다. 풍토가 이미 다르고 습속도 역시 다르오며, 형벌과 벼슬과 혼인과 옥송(獄訟)의 제도가 중국과 같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제 중국의 법으로 다스린다면, 반드시 서로 맞지 않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로 불가한 이유입니다. 삼한(三韓)은 땅이 박하고 백성이 가난하며 모두 산에 의지하고, 바다에 막혀 새벽 하늘의 별처럼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으며, 풍족한 군(郡)ㆍ현(縣)ㆍ시정(市井)ㆍ도읍(都邑)이 없습니다. 이제 행성(行省)을 설립한다면 사세상 모름지기 호구를 초록(抄錄)하여 호적을 만들고 세금의 부과(賦課)를 법정(法定)하여야 하니, 변방의 섬 오랑캐인 그들이 이런 일을 드물게 보았기 때문에 반드시 놀라고 동요하여 도피하면서 서로 난을 선동할 것이니, 만일 뜻밖의 걱정이라도 불러 일으킨다면 이해에 깊이 관계가 됩니다. 이것이 세 번째로 불가한 이유입니다. 本國,去京師數千里之遠風土旣殊,習俗亦異,刑罰爵賞,婚姻獄訟,與中國不同,今以中國之法治之,必有捍格枝梧不勝之患,其不可二也,三韓,地薄民貧,皆依山阻海,星散居止,無郡縣井邑之饒,今立行省,勢須抄籍戶口,科定賦稅,島夷遠人,罕見此事,必驚擾逃避,互相扇動,脫致不虞,深繫利害,其不可三也
예나 지금이나 외국물 먹었다고 으시대는 자는 있었나 봅니다.
돌아다니다가 다산의 다음 글이 가슴에 와 닿아 긁어 옵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 다산시문집 제13권 서(序) 사신으로 연경에 가는 교리(校理) 한치응(韓致應)을 전송하는 서 [그때 서장관이 됨.] 장성(長城)의 남쪽, 오령(五嶺)의 북쪽에 나라를 세운 것을 '중국'이라 하고, 요하(遼河)의 동쪽에 나라를 세운 것을 '동국(東國)'이라 한다. 동국 사람으로서 중국을 유람하는 것을 감탄하고 자랑하고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나의 소견으로 살펴보면, 그 이른바 '중국'이란 것이 나는 그것이 '중앙[中]'이 되는 까닭을 모르겠으며, 이른바 '동국'이란 것도 나는 그것이 '동쪽'이 되는 까닭을 모르겠다. 대체로, 해가 정수리 위에 있는 것을 '정오(正午)'라 한다. 그러나 정오를 기준으로 해가 뜨고 지는 그 시각이 같으면 내가 선 곳이 동ㆍ서의 중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북극(北極)은 지면에서 약간 도(度)가 높고, 남극(南極)은 지면에서 약간 도가 낮기는 하나, 오직 전체의 절반만 된다면 내가 선 곳이 남ㆍ북의 중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동서남북의 중앙을 얻었으면 어디를 가도 중국 아님이 없으니, 어찌 '동국'이라고 한단 말인가. 그리고 이미 어디를 가도 중국 아님이 없으면 어찌 별도로 '중국'이라고 한단 말인가. 이른바 '중국'이란 무엇을 두고 일컫는 것인가. 요ㆍ순ㆍ우ㆍ탕(堯舜禹湯)의 정치가 있는 곳을 중국이라 하고, 공자ㆍ안자(顔子)ㆍ자사(子思)ㆍ맹자의 학문이 있는 곳을 중국이라 하는데 오늘날 중국이라고 말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성인의 정치와 성인의 학문 같은 것은 동국이 이미 얻어서 옮겨왔는데, 다시 멀리에서 구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오직 전지의 씨 뿌리고 심는 데에 편리한 방법이 있어서[田疇種植之有便利之法] 오곡(五穀)이 무성하게 하는 것은 옛날 양리(良吏)가 남겨준 은혜이고, 문사(文詞)의 예술(藝術)에 해박하고 고상한 재능이 있어서 비속(鄙俗)하게 하지 않은 것은 옛날 명사(名士)의 여운이다. 지금 마땅히 중국에서 이익을 취해야 할 것은 곧 이것일 뿐이며, 이 밖의 것은 곧 강경(强勍)하고 사나운 풍습과, 교묘하고 기궤(奇詭)한 기예(技藝)라, 예속(禮俗)을 망치고 인심을 방탕하게 하는 것으로서 선왕(先王)이 힘쓰던 것이 아니니, 무슨 볼 것이 있겠는가. 내 벗 해보(徯甫 한치응의 자(字))가 사명(使命)을 띠고 연경(燕京)에 가게 되자 자주 중국에서 노니는 것으로써 얼굴에 뽐내는 빛이 있으므로 내가 일부러 중국ㆍ동국의 말을 하여 그를 자제시키고, 따라서 이와 같이 권면한다. [주D-001]오령(五嶺) : 중국 교지(交阯) 합포(合浦)의 경계에 있는 산명. 즉 대유(大庾)·시안(始安)·임하(臨賀)·계양(桂陽)·게양(揭陽)의 다섯 산. ===================================================================================================================※ 한치응 [韓致應, 1760~1824] 본관 청주. 자 혜보(徯甫). 호 병산(甹山). 1784년(정조 8)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792년 홍문관에 등용되고, 1795년 관동 암행어사에 이어 교리 ·집의를 역임, 1799년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중국 25사만 조작하면 역사가 바뀐다고 생각하며 거품을 무는 환빠들.. 한문 해독이 안되어 교주의 誤譯을 ctrl-c, ctrl-v로 받아먹으며 연명하는 환빠들.. 중국 역사사료는 25사밖에 없다고 믿는 환빠들... 삼국이 대륙에 있었다고 말하면, 어떠한 오역과 牽强附會와 억지와 날조와 거짓말도 용인하는 환빠들... 다음 몇 개만 설명해주면 난 좋겠어.
이것은 河南省 登封縣에 있는, 당나라시대의 재상을 지낸 李林甫의 嵩陽觀紀盛德感應頌碑야. 嵩山의 嵩陽觀(그 전에는 嵩陽寺란 사찰이었다가 수나라 양제때 嵩陽觀이란 도교사원이 되었다가 後周때 太乙書院으로 바뀌었음) 입구에 서있는 데, 높이9m,가로2.04m, 두께1.05m의 비석이지. 천보 3년에 건립되었는 데, 李林甫가 쓰고 徐浩가 새겼지. 너거들 말로라면 당의 재상이 쓴 비석이 왜 여기 서있을까??? 위대한 고구려나 백제나 신라가 그 곳에 있었는 데??? ① 아, 그건 말입네다.. 후대의 일본이나 짱깨가 역사를 조작하려고 그리 옮겨 놓은 겁네다...[젠장....] ② 환빠인 내가 제정신이 아닙니다. 미쳤습네다... [정답 : ②] 환빠 너거들은 金石文이 뭔지 모르는 것이 분명해.. [唐安西副都護陶大有碑] 2001년,偃師市 寇店鎮 郭家嶺村에서 학교증축시에 지하 1m에서 발굴된 唐代의 비석이야. ![]() 이게 왜 여기 있을까??? ① 아, 그건 말입네다.. 후대의 일본이나 짱깨가 역사를 조작하려고 그리 묻어 놓은 겁네다...[젠장....] ② 환빠인 내가 제정신이 아닙니다. 미쳤습네다... [정답 : ②] [李亶墓志 및 妻 盧氏墓志] 25사에 안나오는 인명이니 허튼 짓도 못하겠지?? 2006년 하남성 偃師市에서 출토된 묘지명이야. 李志는 총988자, 盧志는 총 728자의 명문이 있어. 大唐故李府君墓志銘, 唐故平原郡太君盧氏合附銘이라 명기되어 있지. 大足元年歲次辛丑六月壬寅朔廿四日乙丑終于洛州恭安里之私第,春秋六十.(이씨) 年七十六,以開元廿五年夏四月丙午終于洛陽會節里第(노씨) 당나라의 백성이었던 이 사람들의 묘지명이 왜 언사시에서 나와야 하지?? ① 아, 그건 말입네다.. 후대의 일본이나 짱깨가 역사를 조작하려고 그리 묻어 놓은 겁네다...[젠장....] ② 환빠인 내가 제정신이 아닙니다. 미쳤습네다... [정답 : ②] [大唐故銀青光祿大夫饒州刺史來府君墓志銘 및 大唐故銀青光祿大夫饒州刺史來府君妻蘭陵郡夫人蕭氏墓志銘] 2005년 역시 偃師시 緱氏鎭에서 출토되었어. 앞의 묘지명은 788자, 뒤의 것은 650자의 명문이 있어. 以開元五年歲次丁巳七月十日,遘疾薨于河南會節里之私第也,春秋七十 (앞의 것) 以六年歲次戊午正月十一日景(丙)午,葬于緱氏公路澗之西原(앞의 것) 以開元七年五月廿日遘疾薨于洛陽會節里,春秋六十有一(뒤의 것) 묘지명에 기록된 지점에 왜 당나라 사람이 묻혀있을까?? 당시에 장례는 외국에서 지냈나??? ① 아, 그건 말입네다.. 후대의 일본이나 짱깨가 역사를 조작하려고 그리 묻어 놓은 겁네다...[젠장....] ② 환빠인 내가 제정신이 아닙니다. 미쳤습네다... [정답 : ②] 25사를 죽어라 물고 늘어져봐야 ‘幻想’이 ‘眞實’이 될 수는 없단다.. ctrl-c, ctrl-v할 시간 있으면 漢字 공부나 한 字 더해서 제대로 눈이나 뜨기 바란다. 율곡의 생애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지만 그 가족에 대한 기록은 거의 본 기억이 없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그 자료를 찾았다. 조선 중기의 유현(儒賢)인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의 문집(文集) 愼獨齋全書에 그 내용이 보인다.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제8권 묘지(墓誌) 율곡(栗谷) 이 선생(李先生) 묘지명 文成公栗谷李先生墓誌銘 여기에 보면, 율곡은 가정(嘉靖) 병신년(1536) 12월 26일에 강릉(江陵) 북평리(北坪里)에서 아버지 李元秀와 어머니 평산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이 때 사임당의 나이는 33세]. 외조부는 申命和다. 서울의 우사(寓舍)에서 갑신년(1584) 1월 16일에 별세했다. 부인은 노씨(盧氏)이니, 관향이 곡산(谷山)으로 종부시정(宗簿寺正) 노경린(盧慶麟)의 딸이었으며 성품이 인자하고 온화하였다. 임진년(1592)에 선생의 신주를 안고 묘소 곁으로 갔다가 적을 만나 꾸짖던 끝에 화를 당했는데, 그 일로 인하여 국가로부터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부인에게는 아들이 없다. 서출로 2남 1녀가 있는데, 아들은 이경림(李景臨), 이경정(李景鼎)이고 딸은 나의 첩이 되었다. 이경림의 아들은 이제(李穧), 이거(李矩), 이추(李秋), 이칭(李稱)인데 제는 참봉이다. 이경정의 아들은 이임(李稔)과 이치(李穉)이다. 이로써 보면, 율곡의 正妻인 곡산 노씨(? - 1592년)는 자녀가 없었고 첩에게서 2남 1녀가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율곡의 딸은 김집의 첩이 되었다.女爲集妾 이 庶子가 율곡의 後를 이어갔던 것이다.
[다른 자료] 盧慶麟 1516년생. 1568년 4월 사망. 율곡은 곡산 노씨와 1557년 결혼. 중종 31 (1536 병신 嘉靖 150 12월 26일 寅時, 江陵府 北平村에 있는 외가에서 태어나다. 명종 16 (1561 신유 嘉靖 40) 26세에 부친 贊成公의 喪을 당하다. 선조 2 (1569 기사 隆慶 3) 외조모 李씨가 죽다 1574년 6월, 庶子 李景臨이 태어나다 1579년 庶子 李景鼎이 태어나다 1584년 서울 大寺洞에서 卒하다. 조선왕조실록 순조 23년 계미(1823, 도광 3) 4월 9일(무신) 예조에서 해주의 유학 이원배와 이용이 격쟁하여 원정한 것에 관해 아뢰다 예조에서 해주(海州)의 유학(幼學) 이원배(李源培)·이용(李鎔)이 격쟁(擊錚)하여 원정(原情)한 것에 관해 아뢰기를, “이원배가 말하기를, ‘저는 선정신(先正臣)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9세손인데, 당내간(堂內間)에 별안간 종통을 앗아간 변을 당하였습니다. 문성공은 적자(嫡子)가 없어서 소실의 아들 고(故) 교관(敎官) 이경림(李景臨)이 제사를 받들어 손자 고 참봉 이제(李穧)와 증손 고 별제(別提) 이후시(李厚蒔)에 이르렀습니다. 이후시의 아들은 이계(李繼)인데 이 계가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아들이 없이 일찍 죽자, 이계의 처 박씨(朴氏)가 이계의 4촌 아우인 이윤(李綸)의 아들 이일흥(李一興)으로 후사를 삼았습니다. 숙종[肅廟] 갑자년에 ‘선정의 봉사손(奉祀孫)을 녹용(錄用)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 계의 6촌형 이연(李綎)이 선정신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의 문하에 출입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내심 종수(宗嫂)는 미약하고 양자는 어리니 벼슬길을 도모해도 된다고 작정하고서, 은밀히 일가 이신(李紳)을 사주하여 선비들의 집을 두루 찾아다니며 도처마다 「문성공의 증손 이계가 아들이 없이 죽었는데, 그의 자질(子姪) 항렬에는 봉사손으로 세울 만한 사람이 없다.」고 떠들게 하고, 이어 이연이 봉사손에 합당하다고 역설하게 하였습니다. 대체로 이연의 속셈은 기어코 종수와 종질(宗姪)을 제거해야만 계획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일흥이 후사가 된 사실을 숨긴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박세채와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모두 그 말을 듣고 생각하기를, ‘이연이 비록 지파(支派)이기는 하나 본종(本宗)에 사람이 없으니, 선대 제사를 임시 받들게 할 만하다.’고 여기었습니다. 송시열이 드디어 그런 뜻으로 고 상신(相臣) 김수흥(金壽興) 형제에게 서신으로 말하니, 그분들이 바로 연중(筵中)에서 아뢰어 이연에게 초사(初仕)를 제수하고 종사(宗祀)를 받들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용은 말하기를, ‘저의 10대조 문성공 이이의 증손 이후시가 아들 이계를 낳았는데, 이계가 아들이 없이 일찍 죽고 양자로 삼을 만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선정신 문정공 송시열, 문익공(文翼公) 김수흥, 문순공 박세채,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 문충공(文忠公) 이단하(李端夏) 등이 이후시의 종제 이후수(李厚樹)의 아들 이연(李綎)에게 선대 제사를 받들게 하자고 임금께 건의하여 지금 6, 7대에 1백 40여 년을 내려왔으며, 이계의 처가 그의 5촌질(五寸姪) 이서오(李敍五)를 데려다가 아들로 삼아 예종(禰宗)으로 나뉜 지 지금 6, 7대가 되었는데, 그 사실이 다섯 유현(儒賢)의 문집에 모두 실려 있으며 사기(史記)에도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서오의 4세손 이원배가 갑자기 윤상(倫常)을 어지럽히고자 저의 6세(六世)를 사납게 무함하면서 아울러 선정신이 저의 조상과 친하여 선현(先賢)의 종통을 빼앗았다고 배척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지금 그가 거짓으로 꾸민 말이 털끝만큼이라도 그럴싸한 단서가 있을 경우 제가 마땅히 반좌율(反坐律)의 처벌을 받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초 이 연이 들어가서 봉사하게 될 때에 선정신 송시열·박세채가 고 상신 김수흥·김수항·이단하와 상의하여 건의한 전후 사실이 모두 공사간의 문적에 실려 있고 보면, 지금 백여 년이 지나고 6, 7대를 계승한 뒤에 이원배가 바로잡아 달라고 운운한 것은 의논할 수 없으니, 모두 덮어두소서.” 하였다. 栗谷先生全書卷之十八 行狀 先妣行狀 慈堂諱某。進士申公第二女也...慈堂以弘治甲子冬十月二十九日。生于臨瀛。嘉靖壬午。適家君。甲申。至漢城。其後或歸臨瀛。或居蓬坪地名辛丑。還漢城。庚戌夏。家君拜水運判官。辛亥春。遷于三淸洞寓舍。其夏。家君以漕運事向關西。子璿, 珥陪行。是時。慈堂送簡于水店也。必涕泣而書。人皆罔知其意。五月。漕運旣畢。家君乘船向京。未到而慈堂疾病。纔二三日。便語諸息曰。吾不能起矣。至夜半。安寢如常。諸息慮其差病。及十七日甲辰曉。奄然而卒。享年四十八 栗谷先生全書卷之十八 行狀 外祖考進士申公行狀 進士申公諱命和。字季欽...進士生于成化丙申。中進士于正德丙子。嘉靖壬午仲冬初七日乙巳卒。享年四十七。葬于砥平赤頭山麓。其後遷葬于臨瀛助山。進士娶李氏。生女五人。長適張侯仁友。次卽師任堂。次適洪生員浩。次適權君和。次適李君冑男 栗谷先生全書卷之三十三 附錄一 年譜上 辛亥三十年先生十六歲 五月。丁申夫人憂。葬于坡州斗文里紫雲山。 丁巳三十六年先生二十二歲 九月。聘夫人盧氏 辛酉四十年先生二十六歲 五月。丁贊成公憂。 合葬于申夫人墓。 甲戌二年先生三十九歲 六月。庶子景臨生。 己卯七年先生四十四歲 三月。庶子景鼎生 甲申十二年先生四十九歲 正月甲午。十六日疾終于京城大寺洞之寓舍。 先生自歲初寢疾。十四日。聞徐益受巡撫北路之命。欲以方略授之。子弟更諫以爲疾方劇。願毋費精神。先生曰。此國家大事。不可蹉過此機。乃扶坐口號。令弟瑀書之。凡六條。大略宣上仁德。招綏蕃部。伸我王威。殄滅叛胡。簡省使命供億。以紓民力。預察將帥才略。以備緩急。此其絶筆也。因是病益劇。不可爲矣。令子弟門生侍疾。揮婦女勿近。神思安閒。無一言及家事。諄諄如夢中語。皆國事也。鄭公澈來問疾。執手丁寧勉以用人不可偏重。至曉扶起。命易臥席。東首正衣巾。恬然而逝。享年四十有九。前夕夫人夢。黑龍出自寢房。飛騰上天云。○卒之日。家無餘資。其襲斂皆用朋友所襚。城中常僦居。妻子無所託。門生故舊各出財。買宅以居之。○自疾病。上軫念。醫問交道。訃聞。上哀慟。哭音徹於外。下敎曰。賢相卒逝。予心極爲驚痛。命輟朝三日。賜祭致賻加數。店道護送妻孥。遠近士子莫不號慟。如喪親戚。下及廝隷軍民鄕曲氓庶。皆咨嗟涕洟。太學生及三醫生徒各司胥吏。亦皆致奠。盡哀而去。或聚山谷擧哀焉。發引之日。送者塡街咽巷。哭聲震天。禁軍市人等。皆來執炬。光燭都門數十里外。○牛溪先生哭之曰。栗谷於道。洞見大原。其所謂人心之發無二原。理氣不可謂互發等語。皆實見得。誠山河間氣。三代上人物。眞是吾師。天奪之速。不能有爲於斯世。痛矣夫。 三月己亥。二十日葬于坡州紫雲山卯坐酉向之原。 在贊成公墓後數十餘步。
고려시대 天水를 찾다가 어찌하여 알게된 자료..
네이버 테마백과사전에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허준묘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묘. 1992년 6월 5일 경기도기념물 제128호로 지정되었다. 의성 허준 기념사업회가 소유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명의(名醫) 허준의 묘역으로, 임진강 건너 비무장 지대에 있다. 재미(在美) 고문헌 연구가 이양재(李亮載) 등이 《양천허씨족보(陽川許氏族譜)》에 기록된 ‘하포리 엄동 선좌쌍분(下浦里嚴洞巽坐雙墳)’이라는 내용을 바탕으로 군부대의 협조 아래 1991년 9월 30일 발견하였다. 면적 50여 평으로 우측 묘는 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의 묘로 추정된다. 허준 생모(生母)의 것으로 추정되는 묘가 한 기 더 있다. 발견 당시 봉분(封墳)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파헤쳐졌고 묘비(墓碑), 문인석(文人石) 2기, 상석(象石), 향로석(香爐石)이 묘 주위에 흩어져 있었다. 묘비는 두 쪽으로 잘려졌는데, 마모된 비문 가운데 ‘양평군(陽平君)’, ‘호성공신(扈聖功臣)’, ‘허준(許浚)’등의 글자가 있다. 허준은 1610년(광해군 2) 16년 만에 25권의 방대한 의학서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하였으며, 1615년에 보국숭록대부에 추증되었다. ============================================================================ 1991년에 발견되었단다... 일제시대가 아니지???? 조선이 대륙에 있다고 주장하는 정신병자들... 한번 설명해보시지.. 일제가, 1991년에 발견될 것을 예상하고 미리 만들어 두었다 할려고???? ㅋㅋㅋ 明年徙升於高麗 이게 해석이 안되어, “다음해 명옥진의 아들 명승사가 무리를 이끌고 고려로 달아났다” 라고 해석할 수 있는 無知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5월 계해일에 명나라 황제가 환자(宦者)인 전 원나라의 원사(院使) 연달마실리(延達麻失里)와 손 내시(孫內侍)를 보내 채단(段), 사(紗), 나(羅) 48필을 왕에게 주었다. 왕이 영빈관(迎賓館)에 나가 맞이하였다. 중서성이 보낸 자문에는 “다음과 같은 황제의 말이 있었다. ‘저 바다 동쪽 고려 국왕은 그곳에서 재작년부터 돌비를 만들어 세우고, 산천에 제사를 지냈으며 여기서는 각처의 전승 소식을 전하고 법복(法服)을 보내었었다. 이로 인하여 사신의 왕래는 중첩되고 왕은 더위를 심하게 먹었다. 그래서 내가 상상하여 보니 산이 국경이 되고 바다로 둘러싸여서 하늘과 땅이 마련하여 놓은 제대로 된 국토(國土)다. 고려 왕은 어진 정치를 하여 이 좋은 나라를 잘 다스렸고 또 우리 이곳의 사신들이 많이 왕래하였기에 왕의 몸을 크게 괴롭게 한 것이다. 그래서 앞서 1년 동안은 내가 사람을 보낸 일이 없다. 지금 너희 중서성은 성에서 사(紗)와 나(羅)와 단자(段子) 48필을 준비하여 가지고 원나라 조정의 옛날 늙은 원사(院使)를 시켜 보내 주게 하라. 그리고 해양용 선박 1척을 골라서 그 배 위에 완전 무장한 군인을 태워서 해상 방어를 하게 하고 그 진 황제(陳皇帝)의 가족과 하 황제(夏皇帝)의 가족을 고려의 서울에 보내라! 그 서울에 가서는 군인도 되지 말고 일반 백성도 되지 말고 한가히 살면서 자기 힘으로 생활케 하라! 왕이 그곳에 머물러 살게 하면 남겨 두고 왕이 승낙하지 않으면 배에 태워 가지고 돌아오라! 너희 성(省) 문서에 자세히 서술하라!’”고 하였다. 또 우승상 왕광양(汪廣洋)이 글을 보내기를 “전에 원나라의 정치가 통제력을 잃었으므로 인하여 뭇영웅이 일시에 일어나서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국토를 할거하였다. 우리 황제는 천시와 천운을 타서 회하(淮河) 서편에서 일어나고 강좌(江左)에서 왕업의 기초를 축성하여 장수들에게 명령하고 사방을 정벌케 하였으며 뭇영웅들을 처서 평정하였다. 그런데 진우량(陳友諒)은 불범하게도 호상(湖湘) 지방을 할거하면서 망령스럽게도 대한(大漢)으로 자칭하였고 명정(明貞)은 천촉(川蜀) 지방을 점거하여 외람되게도 대하(大夏)라고 하였다. 정세가 이러하였으므로 우리 황제는 육사(六師)를 통솔하고 친히 호광(湖廣) 지방에 나아갔다. 이에 진씨(陳氏)는 형세가 궁하고 힘이 다되어 할 수 없이 부하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또 지난해 봄에는 중산후(中山侯) 왕 영천후(潁川侯) 등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수로와 육로로 곧바로 천촉(川蜀)을 진격하게 하였다. 이에 명씨(明氏)는 지탱할 수 없었으므로 나와서 항복하였다. 그들은 모두 이미 황제의 은혜를 입어 용서를 받고 그 생명을 보전할 수 있으나 그러나 도리상 오랫동안 서울에 있게 할 수 없으므로 이번에 그 가족을 귀국에 가서 한가히 거주케 하였으니 가(可)하거든 머물러 두고 불가하거든 곧 돌려 보내라! 당신의 재량에 맡긴다”라고 하였다. 을축일에 진리(陳理)와 명승(明昇) 등 남녀 합계 27명이 서울에 들어왔다. 진리와 명승이 궁중에 들어왔다. 왕이 보평청(報平廳)에 나왔다. 진리와 명승은 계단 위에서 절하였고 왕은 이것을 앉아서 받았다. 예가 끝난 다음 그들은 사신(使臣)의 아랫자리에 앉았다. 명승은 18세요 진리는 22세였다. [고려사 공민왕 임자 21년(1372)] 이것과 대륙고려라는 망상은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 明升:(公元1356~?年待考),原名旻升;湖北隨州人(今湖北隨州)。大夏國末位皇帝,夏太祖明玉珍之子,在位時間從公元1366~1371年爲期五年,終年?歲。明升繼位時年方十歲,改元“開熙”。當時大夏朝廷大臣們不和,由其母彭氏垂簾聽政。 明朝洪武大帝朱元璋登基後,是一個霸心十足的人,他並不只想擁有一個天完國就夠了,而是有稱霸天下的雄心。於是就向與明玉珍盟誓的大夏國明升小皇帝下手了。 起初“奉書”令明升歸降,明升以夏王奉書願意以貢進吳王,卻不想失去夏國。而朱元璋不許,當時洪武帝朱元璋在南京即位,於洪武四年(公元1371年)派欽信國公湯和、傅友德入川取大夏,明升奉表降於朱元璋,大夏滅亡,四川歸於明朝統治。 在南京,明升和紅巾軍另一起義軍首領陳友諒的兒子陳理經常會面發牢騷。這二人雖都還是十幾歲的孩子,但朱元璋怕他們受人盅惑,日後危及大明政權,就派太監將他們遠遠地送到高麗國安置。據史籍《明史》第一二三卷“明玉珍傳”記載,明升後代於明洪武五年(公元1372年)農曆1月,徙往高麗。另據葉子奇在《草目子》一書中的記載:“辛亥七月(公元1371年),台兵攻四川,小升王同其母俱降,其後母召入宮,以海舟送小升王去高麗,飄飄然入於海矣。” 這一事實,在我國的史籍《明太祖實錄》和朝鮮的古文獻《高麗史》中均有記載。《高麗史》中還記錄有明太祖朱元璋給高麗國王恭親王的函旨:“將那陳皇帝老少、夏皇帝老少去王京,不做軍,不做民,閑住他自過活。”次年,明升娶高麗總郎尹熙王之女爲妻,後育有四子,從此在朝鮮半島代代相傳。 如今,韓國“明氏大宗會”副會長明魯升說:在大夏國被滅後的第二年,明太祖朱元璋就將明玉珍之子明升以及其母彭皇後等二十七人遣送到高麗,並宣“不做官,不做民”。明升家族一行來到高麗後,高麗恭湣王把延安、白川兩縣作爲貢物,供奉給明升一家,並將位於松都(今朝鮮開城)北部梨井裏的興國寺提供給他們作爲邸宅,配以奴婢。 明氏一家在高麗定居後,明升與郡夫人坡平尹氏結婚,生有四男:大兒子明義,資憲公、資憲大夫;二兒子明見,總郎公、嘉靖大夫;三兒子明俊,副使公、嘉靖大夫;四兒子明信,侍郎公、通訓大夫。 據韓國歷史記載,明升與朝鮮王朝太祖李成桂交情頗深,經常下圍棋。明升之母彭氏在李成桂登基時,獻上了一套自己親手縫制的“龍袍”,使太祖李成桂感泣。另外,當時在中國流行的唐裝和首飾也開始在朝鮮王朝普及。李成桂爲表謝意,封明升爲“華蜀君”,享受“忠勳世祿”。彭皇後去世後,安葬在朝鮮松都萬壽山的肅陵,並建有祠宇。 明升一家在高麗安家繁衍後,四個兒子的後代便分散在朝鮮半島二十四個地區。日寇侵占朝鮮半島時期,首次實施戶籍制度,把明氏家族分成兩大支系:一支系爲“西蜀明氏”,另一支系爲“延安明氏”。當時的“西蜀明氏”主要指的是本籍在中國四川、當時居住在朝鮮的明氏。“延安明氏”主要指的是,以明氏二世祖明升繁衍生息地延安爲籍貫的明氏家族(主要居住在韓國)。[百度百科] 위의 以海舟送小升王去高麗,飄飄然入於海矣는 읽을 수 있으려나.. 南京에서 松都까지 얼마나 걸리려나...
이전의 제 글에서(2006년 10월) 윤관의 고향 天水를 경기도 파주지역으로 추측한 바 있습니다만, 아마도 그 천수를 찾은 것 같습니다.
어느 지도에서도 나타나지 않던 지명인 天水. 강감찬이 封해 진 天水縣. 五畿八圖 朝鮮國細見全圖란 지도에서 우연히 개성부근에서 그 지명을 찾았습니다... !!! ![]() http://blog.daum.net/sabul358/13362905 (향고도님의 블로그서 무단으로 퍼왔습니다). 향고도님의 설명에 의하면 原圖가 려말선초무렵 제작된 것일 거라 하니 신빙성이 있습니다. 지도를 보시면 , 개성 바로 우측에(파주의 좌측 위쪽에) 天水란 지명이 보입니다.. 저번의 추정이 완전히 엉터리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지도를 소개해주신 향고도님께 감사드립니다... 박창화의 고구려사략을 보자. 第二十二世<安藏大帝>紀 卽位. 春秋四十三. 改元<安藏> -‘안장’이 연호라 한다. 모르지, ‘안장’이라는 연호가 새겨진 금석문이 출토된다면 고구려사략을 한번 믿어보겠다만.... 기록대로라면 안장왕의 출생년도는 서력 477년. 아버지인 문자명왕이 16세때 출생했다는 이야기... 己亥<安藏>元年, 春正月, 壬午朔 - 서력 519년 韓國年曆大典(한보식,1987)에 의하면 음력 정월삭은 신사일이고 임오는 2일이다. 二月, 辛亥朔 上皇崩於<皇極殿>之西寢, 春秋五十八 - 문자명왕이 58세로 죽었다네. 그렇다면 462년 출생이라는 얘기. 문자명왕의 연호가 ‘明治’란다. 역시 금석문이 필요 for proof. 2월 신해삭은 중국력과 일치함. 三月, 辛巳朔 3월 삭은 경진일이고 신사는 2일임 庚子<安藏>二年, 春正月, 丙子朔, 日食 - 서력 520년 정월삭은 을해일이고 병자는 2일임. 이 일식기록은 삼국사기에는 없고 중국측엔 있음. 중국측기록엔 正月乙亥朔이나 1.2 병자일이 정당하다. 十月, 置九卿五館. 先皇之遺命也. 曰<大府卿>掌御藏及泉貨, 卿<爾朱彦>, 小卿二人<吳進>・<芙星>. 曰<小府卿>掌御供營繕, 卿<谷玵>, 小卿<徐文>・<粟秩>. 曰<秘府卿>掌璽宝・玉冊, 卿<王衡>, 小卿<賀萇>・<鵞憲太>. 曰<太常卿>掌祭享吊慰, 卿<琚>太子, 小卿<琚>太子妃<晋嬙>・<王衡>妻<晋華>. 曰<司宰卿>掌宴親御廚, 卿<晋德>, 小卿<桂溫門>・<王羲人>. 曰<衛尉卿>掌羽林・鹵・簿, 卿<晋冕>, 小卿<谷瑨>・<乙支祥>. 曰<太僕卿>掌車馬曰獵, 卿<華日>, 小卿<華日>妻<晋昌>女與<義>太子妃<華蜃>. 曰<鴻矑卿>掌禮賓使行, 卿<稛>太子, 小卿<稛>太子妃・<王姬>妾<鄭婐>. 曰<司農卿>掌勧農恤民, 卿<欒鬲>, 小卿<燕信>・<魚春>. 曰<孝賢館>養孝子賢人, 大夫<呂崇>, 郞中二人<山箕>・<齒鱗>. 曰<翰林館>養文章才士, 大夫<賀國>, 郞中<李勳>・<大房滬>. 曰<國射館>養弓釼武勇, 大夫<齊連>, 郞中<通成>・<牛中>. 曰<司譯館>養譯語外事, 大夫<梁吉>, 郞中<元敏>・<乙中>. 曰<軍器館>掌造兵造船, 大夫<鄭儉>, 郞中<桂長>・<朱越>. - 전혀 알려지지 않은 대부경, 소부경, 비부경, 태상경, 사재경, 위위경, 태복경, 홍로경, 사농경, 효현관, 한림관, 국사관, 사역관, 군기관이란 관직과 관청의 이름이 등장한다. 금석문이라도 하나 나오면야... 홍로경은 중국 漢대의 관직명인데... 대부경, 태상경, 소부경, 사농경, 대복경 이들은 삼국지에 나오는 문관직명인데..
辛丑<安藏>三年, 春正月, 庚午朔 - 521년. 정월경오삭은 중국력과 일치함 五月, <駕洛>君<鉗知>殂, 子<仇衡>立 - 삼국유사에서는 겸지가 4월 7일 죽었다고 함 壬寅<安藏>四年, 春正月, 甲午朔 - 522년. 정월갑오삭은 중국력과 일치함 三月, <原宗>, 以其從弟<比助夫>之女, 妻<仇衡>而結親 -삼국사기에서는 이찬 비조부의 누 이동생을 보냈다 함. 五月, 壬辰朔, 日食. 5월임진삭은 중국력과 일치. 삼국사기에는 없지만 중국에는 일식기록 있음. 癸卯<安藏>五年, 春正月, 戊子朔 -523년. 정월무자삭은 중국력과 일치 二月, <斯摩>, 至<漢城>, 命佐平<國友>・達率<沙烏>等, 發<漢>北州郡民十五以上築<雙城>, 納<沙烏>妻<苩>氏為其妻, 三月還都. - 무령왕의 왕비가 연씨인 데, 백씨를 첩(제2왕후?)으로 들이다. 무령왕이 이 때 몇 살이더라???? 五月, <斯摩>妻<燕>氏, 妬<沙烏>妻<苩>氏, 毒殺<斯摩>. <斯摩>庻子<明穠>秘其喪而自立. - 무령왕이 연씨에 의해 독살되었다네. 성왕이(무령왕의 서자라고???) 그 사실을 숨기고 왕이 되었단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30대여인의 치아는 그럼 백씨의 것이란 말인가??? 뒤의 기사를 보면 백씨는 이때 죽지않았다... 十一月, 癸未朔, 日食. 11월계미삭은 중국력과 일치. 삼국사기에는 없지만 중국에는 일식기록 있음 甲辰<安藏>六年, 春正月, 壬子朔 -524년 정월삭의 일진은 임오가 맞음 乙巳<安藏>七年, 春正月, 丙午朔 - 525년. 정월병오삭은 중국력과 일치 十一月, 壬寅朔. 11월임인삭은 중국력과 일치 丙寅<安藏>八年, 春正月, 辛丑朔, -526년. 정월신축삭은 중국력과 일치 丁未<安藏>九年, 春正月, 乙丑朔, - 527년. 정월을축삭은 중국력과 일치 戊申<安藏>十年, 春正月, 己未朔 - 528년. 정월기미삭은 중국력과 일치 己酉<安藏>十一年, 春正月, 癸丑朔 - 529년. 정월계축삭은 중국력과 일치 八月, 七日丙辰. 8월7일병진도 중국력과 일치 九月, 上, 親率精騎二万自<黃山>出<水谷城>, 命<福>太子引兵一万, 拔<穴城>. <明穠>, 與<燕謨>, 引軍三万迎戦于<五谷>而敗. 生擒男女二千余人而皈. <明穠>, 自<金川>敗後, 日夜練兵以圖報. 以<苩>氏之事, <謝烏>来降, <燕>・<苩>相爭. 上, 因此, 而懲之. - 여자문제에 집요한 고구려사략이 왜 이때 안장왕을 맞이한 한씨여자(삼국사기)를 기록하지 않고 있을까? 523년에는 沙烏, 여기는 謝烏 庚戌<安藏>十二年, 春正月, 戊寅朔 - 530년. 정월삭은 정축. 무인은 2일 三月, 禁行<魏><五銖錢>. 上鑄<安藏元宝>, 而以其銅大而不便於用, 民皆易<五銖錢>用之, 其為損不少 -‘안장원보’란 돈을 만들었으나 실패하다. 十月, 癸卯朔, 10월계묘삭은 중국력과 일치 十二月, 壬寅朔... 甲寅...甲子. 12월임인삭은 중국력과 일치. 갑인은 13일. 갑자는 23일. 辛亥<安藏>十三年, 春正月, 壬申朔 -531년. 일진은 중국력과 일치 五月, 上崩於<黃山>行宮, 春秋五十五. 葬於<牛山><葬玉之原>, 名曰<安藏陵>, 追尊為<安宗和皇帝>. - 시호가 안종이란다. 日本書紀卷十七継体天皇二五年冬十二月...是月。高麗弑其王安. 일본서기에는 안장왕이 피살되었다한다... 오주연문장전산고를 보다보니 신라유사란 책이 등장한다.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5 - 논사류 2 인물(人物) - 한국 원효(元曉)와 의상(義相)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43)에 신라유사란 책을 인용하여 설총의 가계를 설명하고 있는 데, 평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즉, 경주 설씨의 시조는 신라 유리왕대의 사람인 설지덕(薛支德)이고 그의 후손중에 곡(嚳)은 습비후(習比侯)에, 곡의 아들 교(喬)는 대아찬(大阿餐)에 이르렀고, 이금(伊琴)의 아들 사례(思禮)는 출가(出家)하여 중이 되어 호(號)를 원효라 하였는데, 뒤에 환속(還俗)하여 소성거사(少性居士)라 자호(自號)하였다. 사례의 아들 총(聰)의 자는 총지(聰智)로 학문이 해박하고 문장이 뛰어나 방언(方言)으로 구경(九經)을 풀이하여 후학(後學)을 가르치고 또 속어(俗語)로 이두(吏讀)를 만들어 관부(官府)에 사용하게 하였으며, 벼슬은 한림(翰林)에 이르렀고 일찍이 화왕백두옹설(花王白頭翁說)을 지어 국왕을 풍간(諷諫)하였다... 여기서는 (설)지덕...곡-교-이금-사례-총(위의 본문을 보니, 교와 이금의 관계가 사실 불명확하게 기술되어 있다)의 가계를 보인다. 원효대사의 이름이 사례라는 것은 잘 알려지지않은 기록이다. 환빠를 위해서 신라유사나 하나 만들어볼까나.... 신라명필 金生 김생의 生沒년도의 출처가 어디인지 항상궁금하던차에 그 출처를 찾았다.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5 - 논사류 2 인물(人物) - 한국 김생(金生)의 사실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34) 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세상에서 신라의 김생을 동국(東國) 제일의 명필로 친다.《동국통감(東國通鑑)》을 살펴보면, "신라 소성왕(昭聖王) 원년(800)은 곧 당 덕종(唐德宗) 정원(貞元) 16년인데, 소성왕의 휘(諱)는 준옹(俊邕)이니, 휘가 경신(敬信)인 원성왕(元聖王)의 손자이고 그 부친은 인겸(仁謙)이다. 그가 당 덕종 정원 15년(799)에 즉위, 정원 16년에 승하하니 왕위에 있은 지 2년째였고, 애장왕(哀莊王) 중희(重熙)가 즉위하니 소성왕의 아들이다. 또 신경준(申景濬)의《동문휘고(同文彙考)》에 "김생의 이름은 구(玖)이다." 하였는데, 무엇을 의거해서 한 말인지 알 수 없다. 세상에 김생이란 자가 있어 글씨에 능하고 불교를 좋아하면서 초야에 숨어 사는데, 나이 80이 넘도록 글씨에 손을 떼지 아니하여 예서(隸書)ㆍ행서(行書)ㆍ초서(草書)가 다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하였다. 송 휘종(宋徽宗) 숭녕(崇寧) 연간에 한림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이 김생의 글씨를 보고, "우군(右軍 진(晉) 나라 왕희지(王羲之)의 벼슬 이름)의 진필(眞筆)을 오늘에 다시 보게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하였고,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의 사단(史斷)에 "송 나라 숭녕 연간에 고려의 학사 홍관(洪灌)이 진봉사(進奉使)를 따라 송 나라에 들어가 변경(汴京)에 머물러 있을 때 한림 대조 양구와 이혁이 황제의 칙명으로 그림 족자[圖簇]에 글씨를 쓰고 있었다. 이에 홍관이 김생의 행서ㆍ초서 한 권을 보였는데 두 사람이 보고 웃으며 '천하에서 우군을 제외하고는 어찌 이 같은 묘필(妙筆)이 있을 수 있겠느냐.' 하므로 홍관이 누차 해명해 주었으나 끝내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였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김생은 부모가 미천하여 그 세계(世系)는 알 수 없으나 당 예종(唐睿宗) 경운(景雲) 2년(711)에 나서 당 예종 경운 2년은 곧 신라 성덕왕(聖德王) 휘(諱) 흥광(興光) 10년이다.《당서(唐書)》에는 흥광이 지성(志誠)으로 되어 있다. 두타행(頭陀行 걸식(乞食)하면서 수행하는 것)을 닦았고 충주(忠州) 신라 시대에는 국원성(國原城)에 소경(小京)을 두었다. 북진애(北津崖)에 살았으므로 그가 살던 절[寺]의 이름을 '김생사'라 했다." 하였다. 원(元) 나라 조맹부(趙孟頫)는 동경서당 집고첩(東京書堂集古帖)에 쓰기를, "당 나라 때 신라의 중 김생이 쓴 그 나라의 창림사비(昌林寺碑)는 자획(字劃)에 깊은 전형(典型)이 있어, 아무리 당 나라 사람의 명각(名刻)이라 해도 그보다 더 나을 수 없다. 옛말에 '어느 지역인들 인재(人材)가 나지 않겠는가' 했는데, 그 말이 사실이다." 하였고, 이상국(李相國) 이름은 규보(奎報) 은 서결평론 서(書訣評論序)에 쓰기를, "우리 동국의 제일인으로 일소(逸少 왕희지의 자)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이는 바로 김생이다." 하였으며, 세상에서는 전하기를, "한 사람이 갑자기 김생 앞에 나타나《제석경(帝釋經)》을 써 달라고 하여, 쓰기를 마치자 그 사람이 '나는 제석천(帝釋天)의 사자(使者)이다.'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하고 또, "안양사(安養寺)의 액자(額字)를 쓰기 시작한 지 수년 만에 그 절집이 남쪽으로 기울므로 즉시 북쪽으로 옮겨 쓰기 시작하자 절집이 도로 반듯해졌다." 하고 또 청룡사(靑龍寺)의 액자를 썼는데, 그 주위에 구름과 안개가 늘 끼어 있다고 하니, 마땅히 김생을 신필(神筆)의 제일로 쳐야 하겠다. 《예성야록(蕊城野錄)》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지음 에, "김생은 5세 때부터 풍월(風月) 두 글자를 배우면서 굵직한 싸리나무로 모래밭 위에다 썼었고 6~7세 적부터는 불경(佛經) 2권을 부지런히 쓰기 시작하여 20세에 서법(書法)을 대성(大成)하였다. 그때 일본(日本)의 중 혜담(惠曇)도 글씨에 능하였는데, 신라에 와서 김생의 글씨를 보고 매우 기이하게 여기면서 왕우군이 강북(江北)에 건너가 있을 때 썼던 진적(眞蹟)을 주었다. 그는 그 뒤부터서 우군의 글씨에만 전력하여 밤에는 큰 글자를 쓰고 낮에는 작은 글자를 써서 명성이 이웃나라에까지 진동하였고 또 불교를 좋아하여 재소(齋素 고기와 파ㆍ마늘 따위를 먹지 않는 것)를 지켰다. 그 수족(手足)은 가늘고 작아서 부인(婦人)의 것과 같았고 나이 90이 되어서도 눈빛이 전광(電光)과 같아 붓을 손에서 떼지 않다가 나이 97에 죽었다. 당 헌종(唐憲宗) 원화(元和) 2년(807), 즉 신라 애장왕 휘 중희 10년에 죽었다. 일찍이 창림사비를 썼는데, 조맹부가 그 탁본(拓本)을 보고 '한 획과 한 글자가 다 왕씨(王氏)의 서법에서 나왔으니, 당 나라 사람의 명각(名刻)도 이보다 더 나을 수 없을 것이다.' 하였으므로 그 뒤부터 이름이 온 천하에 알려져서 원 나라 사신이 왔을 적마다 으레 그 탁본을 얻어가곤 했다." 하였다. 《지리지(地理誌)》에, "안동(安東)의 청량산(淸涼山)은 모두 36봉(峯)으로 태백산(太白山)에서 낙맥(落脈)되어 예안강(禮安江) 위에 이르러 우뚝 솟았다. 외부에서 바라보면 토산(土山) 몇 봉우리밖에 되지 않는 것 같으나 강을 건너 동부(洞府)에 들어가 보면 4면(面)에 석벽(石壁)이 둘러졌는데 그 둘레가 4장(丈)쯤 되고 돌들이 기괴하고 험악하여 말로는 이루 표현할 수가 없다. 그 안에는 난가대(爛柯臺)가 있는데 곧 최고운이 거기에서 바둑을 두던 곳으로 바둑판과 똑같은 돌이 있고 또 연대사(蓮臺寺)가 있는데 거기에는 신라 김생의 친필로 된 불경(佛經)이 많으며 다른 사찰(寺刹)에도 그 친필이 있다." 하였다. 오출자(五黜子) 김백련(金百鍊)이 일찍이 용(龍)의 문(文)과 무(武)를 논하면서, "관동(關東) 해금강(海金剛) 밑에 용이 있는데 그 용은 문한(文翰)을 숭상하였고 신라 시대에는 그 용의 아들이 김생에게 와서 서법(書法)을 배운 때문에 김생의 글씨가 그 용의 처소에 많이 있다." 하였는데, 이 말이 비록 황당(荒唐)하기는 하나 이분의 황당한 말 가운데에는 더러 맞는 말도 있다. 하지만 어찌 꼭 믿을 수야 있겠는가. 그저 수록하여 이문(異聞)에 대비할 뿐이니, 이는 마치《수신기(搜神記)》나《유양잡조(酉陽雜俎)》와 같은 것이다. 나는 지금 충주(忠州)의 깊은 산골짜기에 살고 있다. 이에 이 지방의 옛날 유명한 인사(人士)들을 상상해보면 신라 시대에 우륵 선인(宇勒仙人)과 임강수(任强首)가 있는데, 그 중에도 김생이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또 김생으로 인하여 생긴 지명(地名)으로는 김생면(金生面)이, 강명(江名)으로는 김생탄(金生灘)이 있어 세속에서 김곶(金串)이라 부른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른바 김생사(金生寺)의 옛터도 아마 이 부근일 터인데 아는 사람이 없으니 아쉬울 뿐이다. => 이 기록을 보건대, 김생은 711년 출생하여 807년에 97세로 죽었다. 따라서 항간의 네이버백과사전등의 711-791년 生沒은 오류이다. 박창화의 高句麗史(十六世至卄世)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이는 군요. 第十六世故國原‘帝’(수정전 글자는 王)紀 ...元年辛卯[331년]... 十年庚子[340년]春正月詔曰農者天下之大本也伏羲而衣食莫如耕作而衣食勸爾大小人民閑散之士皆宜務田力蚕 위의 문장을 보면, 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용어가 거침없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漢書』「文帝本記」: ...二年...詔曰農天下之大本也. 民所恃以生也 가 그에 가까운 듯 한데, 「農者天下之大本」。此語出自宋代陳敷《農書.卷中.牛說》... 네이버의 某者의 블로그를 보니, 고구려가 중국의 역법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식민사학자들의 말이라면서 한심하다는 듯 얘기하며, 고구려는 서역과 같은 九執曆을 사용하였는 바,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인용한 해동역사에 분명히 高麗國이라 명기하고, 또 한치윤도 고려국이라 하는 데도 굳이 이 고려국은 고구려라고 강변하면서 이하 궤변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그 근거로 고려사 권50을 인용하면서, “고려(高麗)는 따로 력(曆)을 만들지 아니하고 당(唐)의 선명력(宣明曆)을 승용(承用)하였던 것이나 (唐에서 宣明曆을 쓰게된) 장경임인년(長慶壬寅年, AD822)으로부터 고려 태조 개국까지는 거의 100년이 지났으며 그 술(術)도 이미 차(差)가 생겼으므로 이에 앞서 당(唐)에서는 이미 개력(改曆)하였던 것이다. 이로부터 (중국에서는 선명력으로부터) 22번이나 바뀌어졌으나 고려(高麗)에서는 아직 이것으로 그대로 써왔던 것이다. 충선왕(忠宣王)에 이으[르]러 원(元)의 수시력(授時曆)으로 바꾸어 쓰게 되었으나...” 의 대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위 문장으로 보면 고려는 당의 선명력만 사용 했으니 위의 해동역사에서 인용한 張世南의 游宦紀聞 권8의 高麗國有九執曆을 자의로 해석하여 역시 환빠의 주무기인 과대망상을 통하여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아가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일단 해동역사에서 인용하고 있는 유환기문의 원문을 한번 봅시다. 髙麗國有九執厯正如此竊意厯家以數之少者易算日月天左旋數之不及者少取其易算故假日月右轉也期三百六旬有五日又四分日之一堯典特舉成數而言耳以之均為十二月則多六日無所歸故又每歳作五六小盡取其贏而湊足多之數是以五年必有兩閏以定每歳三百六旬有六日之成數也雖是除閏月每歳只三百六旬有四五日只有二十四氣前後相去皆三百六十五六日也胡學於文公者多見前軰論議皆有所本故復記於此(권8) 고려에는 구집력이 있다는 내용뿐입니다. 구집력에 대한 자료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더 이상 부연하지 않겠지만, 몇몇 자료를 찾아보니, 九執厯出西域唐開元六年詔太史監瞿曇悉達譯之 (古今律歷考 권28) 구집력은 서역에서 온 것으로, 당 개원6년(718년)에야 중국에 소개된 역법이군요. 이때는 이미 고구려가 없어진 후입니다. ㅋㅋ 이제 더 근본적인 문제를 볼까요? 유환기문의 고려가 과연 고구려일까요?? 유환기문 내용을 검색해본 결과, 高麗라는 문장이 전부 4번 등장합니다. 위의 권8의 髙麗國有九執厯에 한번이고, 6권에 다음과 같이 3번 등장합니다. 世南家嘗藏髙麗國使人狀數幅乃宣和六年九月其國遣使金紫光禄大夫檢校司空知樞宻院事上柱國李資徳副使太中大夫尚書禮部侍郎柱國賜紫金魚袋金富轍至本朝謝恩進奉各有四六倣中國體李之詞云跂予望之適江干之弭節亦既 => 본문의 선화 6년은 남송 휘종의 연호로 1124년입니다. 유환기문의 저자인 장세남은 송 理宗대의 사람으로 생몰년은 미상이나 위의 유환기년의 저술연도가 1228년이므로 1225년 전후의 사람입니다. 즉, 본문의 고려는 분명히 우리가 알고있는 고려입니다. 徐兢為國信使禮物官兢之歸因譔髙麗圖經備載其建國立政之體風俗事物之宜上之徽廟覽其書大悅召對便殿賜同進士出身擢為宗丞兼掌書學其奉使時李資謙為太師尚書令髙麗國王多納李氏為后妃由是門戸光顯資徳其弟也金富軾為同接伴金氏為大族自前史已載其與朴氏族望相埒故其子孫以文學進富軾豐貌碩體面黑目露博學彊識善屬文知今古富轍亦有時譽徐嘗宻訪其兄弟命名之意盖有所慕文章動蠻貊此語盖不誣云(권6) => 위의 문장에도 고려가 2번 나타나는 데, 서긍의 고려도경운운과 고려국왕 운운은 분명히 고려일 뿐입니다. 유환기년 자체가 장세남 당대의 여러 가지 일화를 기록한 것 일진대, 그 내용중의 고려가 고려가 아니라 고구려라니, 이런 무식한 망상은 환빠가 아니고서는 감히 생각도 못할 일로 보입니다. 고구려가 독자적인 역법이 있었다면, 당으로부터 624년에 사신을 보내어 얻어온 曆書는 무엇일까요? ( 이 역은 분명히 당의 戊寅曆이었을 겁니다) 고려사 권50의 문장을 토씨하나까지 그대로 맹신한다면 다음의 기록은 무엇일까요? 역시 고려사에 나오는 기록입니다(원문을 잘 찾지않는 환빠의 특성을 감안하여 원문은 제시하지 않습니다). 1022년(현종13년) 송의 건흥력 도입 1052년(문종 6년) 십정력(김성택), 칠요력(이인현), 경행력(한위행), 둔갑력(양원호), 태일력(김정) 편찬 독버섯을 퍼트리지말고, 깊이를 모를진 대 침묵할 지어다..... 오늘 연합뉴스 기사를 보니....
심심해서(?) 뒤적거리다가 보니, 생몰년 미상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진 몇몇 인물들에 대한 내용이 보이길래 집어 옵니다.
박창화의 유고는 일반적으로 소설(?)이라 여기시는 분들이 많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요... 남당 박창화 유고중 高麗史列傳에서 1. 黃周亮[983-1046] 성종 계미년 출생, 정종 병술년 卒. 黃山人. 어려서 外祖父인 大文守에게서 글을 배웠는 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다. 정종9년[1043] 문하시중이 됨. 시호는 景文. 거란의 난때 궁궐의 서적이 불타 없어져 버려, 왕명으로 태조부터 목종까지 7대 사적 36권을 편찬했다. 2. 尹瓘[1042년생] 정종 임오년 출생. 字는 同玄. 坡平人. 아버지는 執衡. 高祖는 莘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않았다. 문종때 과거에 급제. 예종때 오연총과 함께 여진을 정벌하여 9성을 쌓고 公嶮鎭에 비를 세워 경계로 했다. 지방이 300리로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북은 盖馬山에 끼였으며(介), 남으로는 長州와 定州에 접했다. 남당 박창화 유고중 麗史列傳에서 1. 黃瑩[1035-1108] 정종 을해년 출생. 예종 무자년 졸. 74세. 시호는 貞敬. 자는 光玉. 황주량의 손자. 腆實好學하여 겨울밤에 妻弟 魏繼廷과 독서를 하다가 닭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그친 적도 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처를 2명 둔 사람들이 많았지만 황영은 1妻만 두었다. 2. 異應甫[966-1048] 광종 병인년 출생. 문종 무자년 졸. 國老가 되어 83세로 죽음. 시호는 良懿. 응보는 율령에 밝고 技工, 造船, 造兵에 능통했다. 아들은 惟恭, 惟忠, 惟正으로 모두 賢貴했다. 3. 崔沆[972-1024] 임신년 출생. 갑자년 졸. 字는 內融. 平章事를 지낸 彦撝의 손자이고 아버지 光遠은 秘書少監을 지냈다. 4. 魏繼廷[1038-1108] 정종 무인년 출생. 예종 무자년 졸. 字는 洪明. 아버지는 畢. 7세에 글을 읽을 줄 알았다. 자라서 文名이 크게 떨치고 과거에 급제하자 뭇 재상들이 다투어 사위로 삼으려 했으나 전부 거절하고 황주량의 寡女에게 장가들었다.
사해의 분책으로 나온 중국역사지명 사전입니다.
pdf 파일을 solid converter pdf로 돌리니 그대로 word 파일로 변환되더군요!!!!!!! good!!! 일단 간자체 파일 그대로 올립니다. 번자체로는 나중에... sahae.r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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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撲滅이라..
..
by 無名氏 at 11/01 죽은 후 추증되었을 수도.. by 초록불 at 09/21 저거 다시 빠진 부분을 집.. by 라디오 at 07/22 無名님/ 오랜만입니다. .. by Comte at 07/13 헉.. 너무 오랜만에 글을.. by 無名 at 07/12 위에 글쓰고 나서 밑에 또.. by 나도사랑을했으면 at 06/01 오늘도 방문하였고 댓글.. by 나도사랑을 at 04/16 사료에 보이는 일식자료.. by 소하 at 04/13 이런 사이트도 있군요. .. by 초록불 at 04/11 와~ 정말 세밀하네요. .. by 지돌스타 at 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