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당유고 려사열전-崔亮傳으로 본 남당유고의 허구

2013년에 품었던 의구심을 이제야 해결하였다.

 

박창화의 남당유고 려사열전-崔亮傳의 기사다.

亮字子暹初名暹字子亮父溫爲甄萱起居郞萱敗歸于我而貧不能自振沒不能葬妻子行乞皐蘭治其喪而救其難亮與其母出棠浦爲君仲取(?)收而饒報皐蘭之恩入雙冀之門魁于戊午而爲攻文博士通文選能屬文成宗潛邸時引爲師友卽位擢用樞要能補佐而協人望歷常侍參政兼司衛卿以疾解官旣而王曰亮在告百日選官依例請解故允之然亮自我潛邸竭其忠貞以匡眇昧言念勤勞未敢忘也乃命復職未幾拜門下侍郞遷內史侍郞兼民官御事同內史門下平章事監修國史十四年[성종. 995]卒王痛悼之贈太子太師賻米三百石麥二百石腦原茶一千角以禮葬之諡匡彬年六十[936년생]配成宗廟庭累贈太尉太保太師內史令三重大匡亮性寬厚雄(?)容未嘗與人爭利雖不生産亦能節約自足長子元信魁甲午[994]而官至戶部侍郞禮賓卿如宋賀正而有失坐流獲(?)冀之學以亮及大守文爲二派而亮之學實出於家庭者多矣其從祖承祐爲萱作檄于太祖時人傳誦其文亮亦得其體以善賦自許及見鄭又玄湖賦而歎曰吾道東矣遂薦又玄爲賦仙而妻其女實雙冀出也常謂人曰八龍雖(?)鳳二藍出靑吾未死矣盖指其婿金審言鄭又玄也審言之學傳于金義珍又玄之學傳于秦玄錫玄錫之學傳于金無滯鄭在元有匡彬集行于世

 

이 기록대로라면 고려 최초의 과거 합격자 최섬이 곧 최량이라는 거다.

최섬의 활동기록은 특별히 보이지 않는 데, 崔亮993(성종 12)에 문하시랑으로 나타나고, 995(성종 14) 4월 정축일에 내사시랑 최량이 죽었다는 기사가 고려사에 보인다.

최량은 고려사에 그 열전이 있는 데, 위 기사는 고려사 열전을 상당부분 전재한 것이다.

고려사열전은 崔亮慶州人性寬厚能屬文光宗朝登第爲攻文博士成宗在潛邸引爲師友及卽位...로 적고 있는 데, 고려사 선거지 選場에 의하면, 광종대 과거는 8회 있었는 데, 합격자 이름중에 최량은 보이지 않는다(생략 누락되었을 수는 있다).

과연 최량이 최섬일까?

 

하지만 이게 허구임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있다.

규장각의 登科錄이다.

여기에 보면,

光宗朝 戊午年[9] 進士 崔暹이 보이고[이름만 보인다],

그 뒤에 라 해서, 여러 자료에 급제사실은 보이나 그 정확한 년월을 알 수 없어 여기에 적는 다면서, 광종대 합격자로 崔亮을 적고 있다. 최량에 대해서는 太尉 匡彬 慶州人이라 부기하여 놓고 있다. 따라서 최량이 최섬일 리가 없는 것이다..

덤으로, 대수문도 허구임을 알 수 있겠다...




by Comte | 2016/06/06 10:46 | 역사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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