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범-라대일 논문의 비판적 검증
박창범, 라대일의 1994년 논문의 비판적 검증

Ⅰ.
서론
1994년 한국과학사학회지 제16권 제2, pp. 167-202에 실린, 박창범, 라대일의 “삼국시대 천문현상 기록의 독자관측사실 검증”이란 제목의 논문은, 그간, 기존학계에서는 거의 무시되어 온 반면, 일반인들에게는 대륙신라, 대륙백제라는 환상적인 주장의 과학적 근거로, 저자의 학문적 배경과 맞물려 그들사이에 엄청난 신뢰도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켜왔다.1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이 논문자체에 대한 직접적임 검증은, 이상한 일이지만, 그동안 전혀 없었다고 보여진다.이제 이 논문의 허구성을 아래에서 여러가지 과학적, 문헌적, 고고학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밝혀 보고자 한다.

Ⅱ.
과학적 측면의 비판
/라 논문의 제목은 비록, 삼국시대 천문현상기록의 독자관측사실 검증이지만, 기실 그 본문에 흐르는 주요맥락은, 초기신라와 백제가 한반도가 아닌 중국대륙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이 주장의 주된 과학적 근거로 저자들은(이하 박/라로 표기하겠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일식기록의 식분의 분석자료를 제시하고 있다./라의 주장으로는, “특정국가가 관측한 일식의 식분도를 모두 합하여 평균하여 보면, 평균식분이 최대인 지역을 찾을 수 있고, 이것이 바로 최적관측지”(p. 189)라는 주장으로 논지를 전개해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이 개념이 옳은지 검증하기 위해 박/라는 도읍지가 확실히 알려져 있는, 후한과 고려시대의 일식에 대해 같은 계산을 하여 그 결과를 p.190 p.193에 제시하면서, 대체로 잘일치한다고 하고 있다.과연 그럴까?/라의 논문에는 그 산출근기를 명시하지 않고 있어, 그 계산이 맞는지 검증해 보았다.사료를 살펴본 결과, 고려 개경(126.6E, 38.0N)에서 관측되었다고 기록된 일식은 모두 82개였다. 이것은 陰雲不見, 陰雨不見등의 기록과 江華시대의 일식기록을 제외한 것이다.DE406 F.R.Stephenson의 ΔT 자료(1997- DE406에 맞게 수정한 것)를 가지고 그 평균식분도를 그려본 바 아래 그림 1과 같았다(이하의 그림자료는 筆名 세연의 계산결과이다).




(그림 1 – 고려개경시대 82개의 평균식분도)



그림에서 보듯이 최대식분지역이 한반도 중부지방이 아니라, 중국의 길림성 白山시 근처로 나타난다.여기서 개경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440km 떨어져있다.이 정도의 차이라면, 최적관측지에서 그 당시의 도읍지를 찾는다는 것은 별의미를 갖지못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든다./라는 논문에서(p. 190), “ 고려에서 실제로 일어난 99회의 일식의 평균식분도에서...식분이 최대인 지역이 한반도중부에 놓여 있어 고려수도의 위치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고 주장하고 있으나, 논문의 그림 9에서 보면 식분이 최대인 지역의 범위가 실제로는, 한반도와 만주, 일본의 규슈, 시코쿠 및 혼슈중 교토서쪽 전체를 포함하는 타원형의 범위내가 되어 실제로 어디인지 알수가 없다./라가 논문에서 제시한 p.191그림 10 ()에 보면, 201년이전 신라일식 16개의 평균식분도도 그 최적관측지가 타원형으로 나오는 데, 그 타원의 중심이 대략 114E, 31N으로 보인다. 논문 p. 179의 記述을 보면, /라는 식분도의 가장 안쪽의 굵은 타원의 中心을 최적관측지로 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논문 p.190의 그림 9, 고려 99개 일식의 식분을 평균한 평균식분도에서 구해지는 최적관측지는 분명히 개성이 아니며, 타원의 중심인 130E, 40N인 함북 성진 동남의 海上인 것이다.여기는 개경 동북 373km지점이다.최적관측지와 실제의 도읍지와는 최소 약 400km정도의 차이가 발생할 수 있음이 일단 여기서 판명된다.또한, /라는, p.193의 그림 11, 후한시대 낙양(112.4E, 34.7N)에서 보인 것으로 기록된 일식의 평균식분도를 제시하면서, “史官이 소문을 들어 적은 것을 뺀 57개의 일식의 평균식분도에서 평균식분이 최대인 지역이 수도 낙양보다 약간 북쪽으로 나타나있다. ... 아마도 사관이 직접 관측하지 않은 일식이 기록보다 더 많아서 수도에서 관측안된 일식이 포함됐기 때문”이라는 궁색한 변명을 하고 있다.그림에서 보이는 최적관측지는 114E, 42N지역으로 여기는 내몽고자치구의 化德(114.0E, 41.9N)근처인 데 여기는 하북성 張家口(114.9E, 40.8N)의 서북 143km지점으로 낙양에서 직선거리로 무려 823km나 떨어진 곳이다.약간 북쪽인 곳이 아니다.저자들의 논리는 스스로 모순성을 보인다.만약 같은 논리라면, 저자들이 임의로 초기신라로 구별한 16개의 일식에서 구해지는 최적관측지가 양자강 유역으로 나오는 것도 동일한 방법으로 설명했어야 했다.또한, 평균식분이 최대인 지역이 최적관측지로, 그 곳이 곧 그 나라의 위치(도읍지)라는 박/라의 개념이 정당하다면, 다른 시대, 다른 국가의 사서에 기록된 일식의 분석에서도 정당한 결과가 나와야 할 것이다.과연 그런지 Sample test를 해보았다.조선시대에 서울에서 볼 수있었던 일식을 대상으로 같은 계산을 시도하였다(계산 및 그림은 세연 제공).기상상태가 좋다면 분명히 보이는 모든 일식을 기준으로 계산하였으므로, /라의 시도가 정당하다면 최적관측지가 분명히 서울로 나와야 할 것이다.첫째는, 1401년부터 1700년까지 서울에서 볼 수 있었던 116개의 일식의 평균식분도이다.계산결과는 그림 2와 같다.
(그림 2 : 1401-1700년간 116개 일식의 평균식분도) 둘째는, 1701년부터 2000년까지 서울에서 볼 수 있었던 119개의 일식의 평균식분도이다계산결과는 그림 3과 같다
(그림 3: 1701-2000년간 119개의 일식의 평균식분도) 마지막으로, 1401-2000년간 서울에서 볼 수 있었던 235개 전체 일식의 평균식분도이다.계산결과는 그림 4와 같다

(그림 4: 1401-2000년간 235개 일식의 평균식분도) 이 결과는 최적관측지로 그 나라의 위치를 추정한다는 것이 실제로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계산에 포함된 일식의 성질이 如何한가에 따라 일치할 수도,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 뿐이다.실제로, 明의 남경시대에 관측된 것으로 기록된 17개의 일식의 평균식분도는 그림 5와 같다. 이것은 명확히 일치한다
(그림 5: 明의 남경시대 17개의 일식의 평균식분도) 위의 그림들은 전부, 같은 기초자료로 계산 한 것이므로 일부만 틀린 결과를 낼 수는 없는 것이다.위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考慮한 일식수가 많을 수록 더 정확한 관측지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추정도 오류임이 분명하다.더욱 결정적인 것은, /라가 논문에서 최적관측지 개념의 정당성의 근거로 제시한 p.191그림 10 (), 787년이후 신라 일식9개의 평균식분도의 오류이다./라는 논문 p.173-174에서 삼국사기에 日當食不食으로 분명히 기록된 801.6.15의 일식을 포함하여 10개의 일식이 실현되었다고 하면서 계산에는 9개의 일식만 포함시킨 이유와 어느 것을 제외하였는 지 밝히지 않고 있다.이 결과를 검증해 본 결과, 다음과 같은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먼저, .라의 논문의 그림은 다음 그림 6이다
(그림 6: /라의 논문에 제시된 후기신라 9개의 일식의 평균식분도) 그림 7, 801년의 일식을 제외한 9개 일식의 평균식분도이다
(그림 7) 결과는 박/라의 논문과 대체로 일치하는 듯이 보인다.그림 8, 801년의 일식을 포함한 평균식분도이다
(그림 8 : 10개 모두로 그린 평균식분도) 그림9, 787년과 801년의 일식을 제외한 8개의 일식으로 그림 평균식분도이다
(그림 9 : 8개의 일식의 평균식분도)

/라의 논문의 그림과 분명히 일치하는 것은 그림 9이다./라의 논문의 그림은 787년과 801년의 일식을 제외한 8개의 일식의 평균식분도이지 9개로 그린 그림이 아니다. /라는 논문에서 실현이라 해놓고 계산에서 어느 것을 왜 자의적으로 제외했는 지 밝히지 않고 있어 의구심을 자아내게 한다.여기서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한 두개의 일식이 들어가고 빠짐으로써, 소위 최적관측지라는 것이 수100km이상을 이동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최적관측지에서 그 나라의 위치를 알아낼 수있다는 것은 수1000km이상의 거리상의 비교에서만 타당한 개념일 뿐, 실용상으로는 거의 의미가 없는 물리학적으로 무의미한 개념임을 여기서 알 수 있다 하겠다.

Ⅲ. 사료적 측면의 비판
, 중국측 자료와의 모순점/라가 논문(p.194)에서 주장한 바대로, 상대신라가 양자강 유역에 있었고, 하대신라는 한반도 남부였으며, 백제가 발해만 유역에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라는 초기신라의 강역이 양자강 유역이었으며, 500년경에 한반도로 이동했다는 대담한 가설을 , 기상현상자료를 추가근거로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문헌상에 그 시기에 대륙에서 한반도로 한 국가가 이동할 정도의 대규모 이동에 대한 기록이 삼국사기나, 이후 그 땅을 차지하게 된 중국왕조의 사서에 기록이 있어야 할 것이나 관련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또한, 초기신라가 건국후 서기 500년경까지 양자강유역에 있었다면, /라가 주장하는 위치인 호북성 孝感(113.9E, 30.9N)이나 武漢(114.3E, 30.6N, 孝感의 동남 50km거리)등에 관한 중국측 기록과 극명한 모순을 보인다.이 일대에는 현재의 지명으로 기타 鄂州, 黃石, 京山, 應城, 黃陂, 咸寧, 麻城, 廣水, 新州, 安陸등이 있다.영토전쟁기사가 아니라면, 타국가의 영역내의 이들 지명을 자기나라 역사와 연관시켜 기술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실제로, 중국사서에서 孝感과 武漢이나 武昌관련 기사만 찾아보더라도 엄청난 자료가 존재한다.
그 몇가지를 예시하면,
- 서기 102, 東漢永元十四年 荊州兵擊巫蠻,許聖降,遷其眾於江夏(湖北新洲)。
- 서기 186, 東漢中平三年 江夏(湖北新洲)兵趙慈反,殺(河南)南陽太守秦頡。
- 서기 196, 東漢興平三年建安元年 江夏(湖北新洲)太守黃祖,殺禰衡。
-
서기 208, 東漢建安十三年 正月,孫權攻夏口(湖北武漢),斬太守黃祖。 
- 서기 221, 曹魏黃初二年 蜀漢章武元年 四月,益州傳言東漢獻帝劉協被殺,漢中王劉備乃稱帝,國號漢, 史稱蜀漢。孫權自公安遷治武昌(湖北鄂州)。 
- 서기 229, 曹魏太和三年 蜀漢建興七年 東吳黃武八年黃龍元年 蜀漢諸葛亮攻曹魏,陷武都(甘肅成縣)、陰平(甘肅文縣 )二郡,凱旋。 東吳王孫權稱帝,是大帝。自武昌(湖北鄂州) 遷都建業(江蘇南京)。
- 서기 265, 曹魏咸熙二年 東吳元興二年甘露元年 西晉泰始元年 東吳帝孫皓殺景帝孫休妻朱皇后及其長次二字。遷都武昌(湖北 鄂州)。曹魏晉王司馬昭卒,子司馬炎繼位。曹魏元帝曹奐讓帝 位於司馬炎,曹魏亡,立國四十六年。 司馬炎國號晉,史稱西晉。 伽利伊納被暗殺,革老丟二世繼位。
- 서기 279, 東吳天紀三年 西晉咸寧五年 西晉大攻東吳,軍將軍司馬但出涂中(江蘇六合) 、安東將軍王渾出橫江(安徽和縣)、建威將軍王戎出武昌(湖北 鄂州)、平南將軍胡奮出夏口(湖北武漢)、南大將軍杜預出江 陵、龍驤將軍王濬出巴蜀,六道並進。
- 서기 315, 西晉建興三年成漢玉衡五年漢趙嘉平五年建元元年 西晉封代公拓拔猗廬代王。西晉武昌太守陶侃擊杜弢, 杜弢兵潰,逃遁不知所終。 
- 서기 322, 東晉永昌元年成漢玉衡十二年漢趙光初五年後趙趙王四年前涼永元三年 東晉元帝司馬睿忌大將軍王敦,引用驃騎將軍戴淵、北將軍劉隗、 書令刁協以抗之。王敦自武昌起兵聲討,抵建康(南京)城下。司馬睿 不得已,殺戴淵、刁協。劉隗奔後趙。王敦引軍還武昌,襲殺梁州 (湖北襄樊)刺史甘卓。 司馬睿卒,子明帝司馬紹嗣位。
- 서기 323, 東晉永昌二年太寧元年 成漢玉衡十三年 漢趙光初六年 後趙趙王五年 前涼永元四年 成漢太傅李驤陷東晉越(四川西昌)、漢嘉(四川名 山)二郡。東晉大將軍王敦自武昌進屯姑孰(安徽當塗),兼揚州 (江蘇南京)牧。 
- 서기 478, 南宋昇明二年北魏太和二年 沈攸之素失人情,但劫以威力,攻郢州(湖北武漢),不克,至魯山(武 漢漢水南岸),軍士潰散,沈攸之自縊死。
- 서기 501, 南齊永元三年 中興元年 北魏景明二年 蕭衍於江陵立南康王蕭寶融爲南齊帝,是爲和帝。統軍順長江東下,陷郢州(湖北武漢),城內被殺或疫死者七、八萬人,比屋皆積屍。再陷新亭(江蘇南京西南)、石頭(南京西)、圍台城(皇城)。南齊帝蕭寶卷斂兵固守,於殿中戎服騎馬出入,一如平日,軍事全委征虜將軍王珍國,既而又欲殺王珍國,王珍國大懼,潛兵入宮,斬蕭寶卷,執其首馳獻蕭衍,蕭衍遂入建康(江蘇南京)。

이들 기록이 모두 거짓이 아닌한, 신라가 그 당시에 양자강 유역에 있었을 수는 없다.


. 한국측 자료와의 모순점
/라의 주장대로, 백제와 신라가 대륙에서 북-남의 형태로 대치했었다면, 양국의 국경은 대략 동-서로 형성되었을 것이고, 분쟁기사에서는 남북간의 충돌상황이 묘사되어야 할 것이나, 삼국사기등의 기록에는 남북의 충돌기사는 전혀 보이지 않고 모조리 동서간의 분쟁으로만 나타난다.

그 기록을 찾아보면,

1.
신라본기
脫解尼師今(탈해이사금) :75
19
10월에 백제가 신라의 西境(서경)인 蛙山城(와산성)을 쳐 빼앗았다.
婆娑尼師今(파사이사금); 87 8 7월에 영을 내리기를, "()이 不德(부덕)한 사람으로, 나라를 다스리어, 西()로 百濟(백제)를 이웃하고, ()으로 加耶(가야)와 접하였으며,阿達羅尼師今(아달라이사금): 167 14 7월에 백제가 國西(국서)의 二城(이성)을 습격하여 부수고, 民口[민구:人民(인민)] 1,000명을 사로잡아 갔다.
伐休尼師今(벌휴이사금): 190
7
8월에 백제가 (신라) 西境(서경)圓山鄕(원산향)을 습격하고 또 진군하여 缶谷城(부곡성)을 에워싸므로, 구도가 精騎(정기) 500명을 거느리고 이를 치니
奈解尼師今(내해이사금): 214
19
7월에 百濟軍(백제군)이 와서 國西(국서)腰車城(요거성)을 쳐 城主(성주) 薛夫(설부)를 죽이니, 왕이 이벌찬 利音(이음)을 명하여 精兵(정병) 6,000명을 거느리고 가서 백제를 쳐 沙峴城(사현성)을 깨뜨렸다.

助賁尼師今(조분이사금): 240

11
년에 백제가 西邊(서변)을 침노하였다.
眞智王(진지왕): 577
2 10월에 백제가 (新羅(신라)) 西邊(서변)의 州郡(주군)을 침범하므로, [()] 이찬 世宗(세종)을 명하여 군사를 출동하여 一善[일선] 북쪽에서 쳐 깨뜨리니…
眞平王(진평왕) : 627
49 7월에 백제의 장군 沙乞(사걸)이 西邊(서변)의 두 城()을 빼앗고 남녀 300여 명을 사로잡아 갔다
善德王(선덕왕) : 633, 642

2
8월에 百濟(백제)가 西邊(서변)을 침범하였다
11 7월에 백제왕 義慈(의자)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나라 서쪽의 40 을 공격하여 빼앗았다.眞德王(진덕왕) : 6482 3월에 百濟(백제)의 將軍(장군) 義直(의직)이 서변을 침범하여 腰車城[요거성] 10여 성을 공략하였다

2.
백제본기
肖古王(초고왕) : 167, 190
2 7월에 몰래 군사를 보내어 新羅(신라) 西境(서경)의 두 城()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남녀 1,000명을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왔다.2 8월에 新羅王(신라왕)이 一吉飡(일길찬) 興宣(흥선)을 시켜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百濟(백제)의 동쪽 여러 城()을 來侵(내침)케 하고…25 8월에 군사를 내어 신라 西境(서경)의 圓山鄕[원산향]을 엄습하고 나아가서 缶谷城[부곡성]을 포위하였다聖王(성왕) : 55331 7월에 新羅(신라)가 (百濟(백제)의) 東北邊(동북변) 취하여 新州(신주) 두었다.威德王(위덕왕
by 팔공산 | 2006/10/28 14:01 | 천문 | 트랙백 | 핑백(2) | 덧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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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ed at 11th fear : 바쿠교수.. at 2008/07/28 01:13

... 하는 문제에는 개인적으로 상당히 흥미가 있다. 왜냐하면 박창범-라대일 일식 연구 논문에는 명백한 data cheating 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참조: http://katnani.egloos.com/489964 그림 6, 7, 8, 9)나는 그래도 지금까지는 박교수가 대학원생 누군가에게 "속았을" 거라고 생각하려 애썼다. 나 역시 사람의 자식인데 어 ... more

Linked at 11th fear : 과학적 .. at 2008/10/14 22:33

... 위치라는 점을 보이기 위해 몇 가지 증거를 제시했지만, 더 자세한 확인 결과 그것은 실은 증거가 될 수 없는 것들임이 드러났다. (http://katnani.egloos.com/489964) 계산은 큰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혀 엉뚱한 것을 계산했다면, 아무리 사칙연산을 제대로 하고 프로그램 코드를 잘 짰어도 ... more

Commented by 초록불 at 2006/10/28 20:58
그림이 안 보이네요.
Commented by 신용득 at 2006/10/29 00:06
초록불님 고맙습니다.
님의 사이트 거의 매일 가봅니다.
원 글은 word 로 쳤는 데, 그냥 갈무리해서 올리니 그림이 안올라갑니다.
방법을 잘 몰라요... 어떻게 하는 지....
그냥 첨부파일로 하면 되는 가요????
^-^
Commented by 신용득 at 2006/10/29 09:28
그림을 어거지로 올렸는 데, 영 위치나 줄이 안맞네요..
좀더 고민해봐야겠습니다.
Commented by 신용득 at 2006/10/29 09:33
성공했습니다. 어렵지는 않네요...^-^
Commented by 초록불 at 2006/10/29 12:42
잘 보입니다. 그림과 같이 보니 금방 이해가 되네요.
Commented by Shaw at 2007/06/22 16:28
신선생님, 서울에서 관측된 일식의 "최적관측지" 를 도출한 계산 가운데, 식분이 상대적으로 큰 것만 가지고 수행한 것도 있는지요? 식분 이야기는 예전에 역사 21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결론이 어떻게 되었는지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Commented by Comte at 2007/06/22 17:30
아이구 오래된 얘기를 ....^-^
그 일식 계산그림은 역사 21의 세연님이 작성하신 겁니다...
저는 프로그래밍 능력이 없어서...
기본 소스는 있는 데, 어느 분, C나 비베 능숙하신 분이 짜주시면 아직도 해볼 게 많은 데....

그 그림은 관측가능한 모든 일식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식분이 상대적으로 큰 것만 가지고 한 것은 없답니다...
세연님께 직접 여쭤보시면 새로 그려 주실지 모르겠네요....

다 그렇듯이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미 판가름 난 얘기입니다..
Commented by Shaw at 2007/06/22 20:45
사실 박창범-라대일 연구에서도 개별적인 일식이 어떤 식분을 가지는지는 처음부터 고려할 수도 없기에 "검증" 에서의 식분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고람거사님 블로그의 리플을 보았더니 일부 반대자들이 이것을 문제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사람들의 주장대로라면 박-라 연구도 애초에 방법론이 잘못된 셈이지만, 그들 주장대로 해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ㅡㅡ;;
Commented by Shaw at 2007/06/23 04:50
아하, 다시 생각해 보니 박-라의 최초 가설에서는, 천문 기록의 일식 기사가 실제 일식 현상 가운데서 랜덤하게 기재된 것인가 하는 문제를 확실히 다루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고려시대에 대한 분석을 보면 "뭐든 상관없다" 고 생각했다는 느낌인데, 어떨지요...

만약 기재가 무작위로, 혹은 인문적인 요소에 의해 결정되어 기재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면-더 구체적으로는 개별 일식의 식분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면 박-라의 최초 가설은 다음과 같이 두 개로 분리할 수 있지 않을까요?

"1. 관측지점에서의 식분이 높은 일식일수록 많이 기록되었을 것이다"
"2. 해당 지점에서의 식분이 상대적으로 낮은, 소수의 데이터는 평균 식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이건 원래도 있었던 것)

그렇다면 데이터를 샘플링해서 식분이 높은 것이 더 많도록 바꾼다면 1번 가정이 참이라고 이미 인정하는 것이 되겠네요.

2번 가설이 참이 아님은 이미 "후기 신라" 에 대한 분석을 통해 입증이 된 듯 한데, 이것은 데이터 수가 비록 적지만 박-라의 후한대 일식에 관한 논의를 보면, 비교적 데이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최적 관측지가 수도가 아니니, "지방에서 잰 것" 이라는 그 새로운 가정이 옳다해도 이미 저자들 스스로 2번 가설이 틀렸음을 자인한 것이고 그 가정이 옳지 않다면 이번에는 1번 가설이 오류임을 시사하는 것 같습니다.

좀 더 생각해 보면, 박-라는 결과의 오차 한계에 대해 전혀 말 할 수 없기에 통계적인 영역으로 문제를 끌고갔지만, 제가 보기에는 통계적인 방법론에 이미 저 두개의 가설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이 경우 고려시대나 후한 시대에 비견될 정도 수효의 삼국 각국의 일식 기록 모집단이 존재했다면, 그 최적 관측 위치는 수도의 위치와 근사하게 나왔으리라는 생각이 이미 깔려있는 듯 한데요.

이 역시 고려와 후한대의 식분도를 통해 부정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2번 가설인지, 1번 가설만 따로 분리해서 검증할 수 있는지 어떠한지 궁금해집니다. (개인적으로는 둘 다 미덥지 못하지만..)

제 생각에 문제점이나, 고려하지 못하고 놓친 것이 있는지요? 갑자기 옛날 일을 꺼내어 송구스럽습니다만, 선생님께서 가르침을 주십사 이렇게 적어봅니다...


p.s. 고대사서의 천문 기록 가운데서는 보통 어느 정도의 식분이면 일관들이 관측한 실측치라고 인정받는지요?
Commented by Comte at 2007/06/23 10:57
Shaw님 전문적인 질문을 하셔서 제가 어쩔 줄 모르겠네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일식은 , 아마도 그 전의 고유의 사료에 있는 일식기록들 중 , 중국기록과 대조하여 김부식이 취사선택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역산해보면 식분이 더 큰 일식도 삼국사기에서는 누락시킨 게 많거든요... 단순히 자료의 인멸에 따른 기록의 부재라 보기에는 ....

박-라의 논문에서는 관측지를 모른다고 가정하고 있으므로 식분이 상대적으로 큰 일식만 포함시킬 수는 없으므로 식분이 높다 낮다라는 구분은 무의미합니다.
동아시아 일정구역에서 관측된 일식을 가지고 지상의 특정지점(격자형태)에 대해 식분을 계산하여 평균한 것이 소위 말하는 최적관측지입니다.

해당 아시아 지역에 그 일식의 중심식대가 얼마만큼 지나갔느냐에 따라 식분의 최적관측지라는 것이 기계적으로 결정되는 것이지, 이것이 실제관측지와 어떠한 연관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중국의 모든 왕조-이들은 관측지가 어디인지 거의 다 알수 있습니다-에 대해 각각의 왕조별로 최적관측지라는 것을 구해보면 박-라의 주장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더욱 분명히 입증될거라 짐작하지만 手記로 하기는 사실상 너무나 공이 들어 아직 착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식분이 높은 일식일 수록 많이 기록되었을 거라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어느 식분이상되면 일식이 보인다 안보인다로 나누어질 뿐이지 식분 0.8이 식분 0.4보다 2배더 잘 보인다는 식의 산술적 논리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일반인들의 경우, 일식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모를 경우에는 식분이 0.7정도이상이 되어야 일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는 연구결과(Ginzel)등도 있긴하지만 아시다시피 전문역관들은 이미 예보를 통해-맞든 안맞든- 일식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실측이라 인정받느냐의 여부는 별도로 조사된 것이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만,
중국일식기록의 逆算을 통한 조사에서는, 식분 0.1정도가 한계가 아니었나 합니다.
宋대 일식기록중 식분 0.1의 일식을 或見或不見이라 한 것이 보입니다.
이 것도 절대적인 것은 아닌지라 시대별로, 아니면 그 曆官의 관측능력등에 따라 달라져 획일적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즉, 기록상으로 관측할 수 없었다(陰雲不見, 陰雨不見 등)고 명백히 기록된 일식을 제외하고는 계산에 다 포함시켜야 할 것입니다.

Commented by Shaw at 2007/06/23 21:41
감사합니다. 대륙론자들의 전가의 보도가 박-라인지라, 선생님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자료들이 굉장히 좋은 반박 근거가 됩니다. ^^
Commented by Comte at 2007/06/24 00:06
글이 정돈상태가 엉망이라 정리하였더니 뒷부분이 잘려버렸습니다.
길어서 그런 모양입니다.
필요하시면 나중에 다시 뒷부분을 추가로 올리겠습니다...
Commented by 무진장 at 2009/11/13 05:35
삼국사기*조선왕조실록에는 삼국사로 나오며, 정정말에서는 고려 혜종때 한나라왕족 김부식이가 중국사서를 한반도에 일부 끼워맞춰 집필한것
가 한반도의 역사를 추가로 인용해 덧붙였을 가능성이 있죠.
신라가 한반도로 이동했다는 명확한 사서의 입증도 투후 김일제관련 경주의 가짜비석과 시대를 추정해도 안맞죠.
신라는 산동성에 있었고, 통일신라시기 천문관측지에 산동반도의 끝머리도 스치고 있죠,
나는 천기로 해석하여 블로그를 합니다. 님보다 맞는것을 배우나 내용이 적고 솔직히 역사가 장난감이 아니니 난감해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 태연한 왜곡을 많이 합니다.
추측은 추측으로 말하며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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