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고이왕 16년의 태백습월기사의 동정

 

삼국사기 소재의 여러 천문현상중에 백제 고이왕 16(서력249)소재의 太白襲月기사에 관해 한가지 해석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해석이 되지 않았던 이 기사에 대한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함과 아울러 이로써 삼국사기의 정확성에 대한 또 다른 추정도 하여 보고자 합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古爾王十六年春正月甲午太白襲月기사는 그동안-적어도 제가 조사한 바로는-해석이 되지 못했었습니다.

일본의 古天文學者 治와 小賢二는中國古代天文記錄檢證(雄山閣, 1992)의 제7장에서 晉書중의 천문기록을 분석하면서,

“…魏 齊王 嘉平元年 正月甲午(6)는 서력 249 2 5일인 데, 太白襲月이라 되어 있지만, 이 날 지방평균시 19(洛陽기준)에 달은 황경 14°, 금성은 289°에 있어 전혀 모이지 않았다(不合). 이 기사는 의심스럽다(不審). 삼국사기에도 백제 고이왕 16년 春正月甲午太白襲月이라 되어 있지만 이 것도 잘못된 것으로 晉書를 流用  한 것이 분명한 듯하다라고 쓰고 있고(p.150),

또한 박창범, 라대일의, 삼국시대 천문현상 기록의 독자 관측사실 검증 (한국과학사학회지, 16 2(1994), p.167)에서도 이 기사의 해석이 곤란했던 탓인지 별도의 언급이 없이 그냥 지나치고 있습니다.

과연 이 太白襲月의 기사는 전혀 엉터리인 것일까요?

잘못된 기사가 韓中의 史書에 동시에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이런 의문점을 가지고 이 기사의 해석을 시도해보고자 합니다.

기존의 각종 연구성과등을 보면 삼국사기는 상당히 정확한 사서임에 틀림없습니다.

가장 최근 예인 풍납토성의 발굴결과에서도 그 사실을 충분히 짐작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따라서 본 기사는 무언가 분명히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가정에서 본 조사를 시작합니다.

어느 논문에서 봤는지 지금은 찾을 수 없습니다만,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중국의 역사서를 참조하여 동일한 기사가 있는 경우는 그 기사를 따라 기술하고 우리나라 독자적인 것인 경우에는 우리 기록을 그대로 기록했다고 하더군요.

예를 들어, 우리나라 기록에 대낮에 해가 가리워졌다 라는 기술이 있을 때 중국기록에 동일한 것이 보이는 경우는 이를 日有食之 란 용어로 고쳐 쓴 것 등 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삼국사기와 晉書의 기록의 字句가 일치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두 나라의 기록에 이 太白襲月의 기사가 있는 걸로 보아 분명히 어떤 천체현상-여기서는 금성이 달에 가리워지는 현상-을 實見한 기록으로 보아야 할 것 입니다.

古天文學의 연구성과에서 보면, 25사의 각종 기록에서도 그 기록자체는 정확하지만 연도상으로 1-2년의 차이를 보이는 것이 빈번히 발견되고(위의 治와 小賢二의 책등 참조), 우리나라 삼국사기의 기사도 1-2년의 오류를 보이는 것이 散見됩니다.(예를 들면, 광개토왕비나 백제 昌王의 명문등에서).

따라서 기록상의 연도인 249년 정월갑오(서력으로는 25)에 백제의 도읍지 위례성(최근의 발굴결과에 따라 풍납토성으로 하겠습니다)과 魏의 도읍지 洛陽에서 엄폐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 이 기사를 잘못된 것이니 의심스럽다니 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 아닐까요?

기존의 연구성과에 따라, 상기 기록에 1-2년의 오류가 있을 수도 있으니 이를 감안해서 조사해 볼 필요성이 여기에서 대두됩니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시도하였는 바, 계산방법을 대략 설명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관측지는 일단 풍납토성으로 하고 그 지리좌표는 동경 127.12°, 북위 37.54°, 표고는 30m로 합니다.

2.      249년 무렵의 위치계산을 위해서는, 지구자전 속도의 느려짐에 따른 시각계의 보정치(전문적인 용어로 ΔT = 力學時(TT) 世界時(UT)라 합니다)를 알 필요가 있는 데, 이는 Stephenson의 연구치(1997)를 基準하여

VSOP87 ELP2000에 맞추어 +7649秒로 합니다.

3.      이상의 자료로, VSOP87 ELP2000을 사용하여, 서력 240년부터 260년 사이에- 이 정도 범위라면 충분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풍납토성에서 볼 수 있었던 달과 금성의 엄폐현상일자를 전부 계산합니다.

 

계산결과 풍납토성에서 보이는 金星食은 단 3회로, 다음과 같습니다.

서력 241 1221(음력 十一月二日辛未)

서력 248 8 9(음력 七月三日甲午)

서력 258 124(음력 十二月三日己巳)

 

위의 3회의 금성식의 상세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시각은 LMT, 각도는 °)

번호

ΔT(sec)

잠입

금성 고도

해의 고도

출현

금성 고도

해의 고도

금성의 밝기

해로부터 離角

+7701

06:58

-13.8

-3.4

08:05

-1.0

+7.5

-3.9

11.8E

+7653

07:44

-2.4

+29.9

08:44

+9.0

+41.7

-4.0

34.0E

+7567

09:33

+12.1

+21.7

10:03

+17.2

+25.3

-3.9

21.0E

 

한편, 낙양에서의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번호

ΔT(sec)

잠입

금성 고도

해의 고도

출현

금성 고도

해의 고도

금성의 밝기

해로부터 離角

+7701

06:05

-23.3

-12.6

06:53

-13.9

-3.2

-3.9

11.8E

+7653

06:49

-14.5

+18.6

07:43

-3.4

+29.6

-4.0

34.0E

+7567

08:06

-3.0

+10.0

08:51

+5.5

+17.4

-3.9

21.0E

 

엄폐가 보이려면, 일단은 고도가 陰이 되어서는 안되고, 충분히 어두워야 합니다(해가 뜨기 일정시간 전이어야한다는 의미입니다, , 별이 충분히 밝을 경우에는 예외가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금성입니다).

위의 일자중 풍납토성에서는 248, 258년 것만 보이고 낙양에서는 258년 것만 보입니다.

양자를 모두 만족시키는 것은 258년 것이 유일하나,

이는 일진이 己巳이며 기록의 249년에서 너무 멀리 떨어집니다. 또한 해로부터의 이각이 작아 낮에 금성을 보기가 힘든 상황입니다.

또한 번의 경우는, 일진도 辛未일 뿐 아니라, 엄폐는 兩國에서 공히 보이지 않으며, 엄폐가 아닌 犯으로 보기위해서도-실제로 治와 小賢二의 검증등에 의하면 25사에 엄폐로 기록된 상당수가 犯(근접)이 었다고 합니다- 그 조건이 열악(해로부터의 이각이 11.8°에 불과하여 이 무렵에 금성을 보기란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합니다.

 

그 결과 유일하게 248 8 9일의 엄폐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기사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1. 일자가 기록의 년도와 1년정도(정확히는 반년 정도)의 차이를 보인다.

2. 日辰이 일치한다(유일하게)

 

이 엄폐는, 풍납토성에서 보았을 때,

시작(潛入)은 보이지 않습니다.

금성의 시고도가 지평선하 2°에 있을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하에서는 풍납토성에 있는 관측자는 금성의 엄폐가 있는 지는 아직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08:44(지방평균시)에 금성이 달 뒷편에서 나왔을 때(出現),

금성의 고도는 지평선위 9°이었습니다. 이 때 금성의 밝기는 -4.0등급정도로, 해가 이미 떠 있었으나 금성의  離角이 34°정도로 금성이 달뒤에서 출현하는 것을 충분히 볼 수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한편, 낙양에서는,

潛入시(금성의 고도는 地平線下 14°)와 出現시(지평선하 3°) 모두 실제적인 엄폐를 볼 수는 없었지만 日官은 犯은 분명히 알 수 있었고 따라서 엄폐가 있었음도 유추해볼 수 있었을 겁니다.

실제로 낙양에서 볼 때에는 엄폐보다는 犯이 정확하지만 이런 연유에서 엄폐로 기록한 것이 아닐까 추정됩니다.

 

春正月甲午와  七月甲午는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은 김부식이 사서편찬시 正月에 근거해 충분히 추가시킬 수 있을 터이고(이렇게 한다고 해서 기록이 조작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正月은 原사료에 七月인 것이 어떤 연유로 一月로 읽힌 게 아닐까 상상해봅니다.

그러면 칠월 -> 일월 -> 정월로 기록될 수 있지 않았을까요(이 부분은 사실 막연한 추정입니다만, 실제로 신라본기 문무왕대의 서력 679  六月과  八月의 금성엄폐 기록에서 저는 그 가능성을 봅니다. 계산해 본 바 八月의 기록은 六月의 오류   衍文으로 여겨집니다).

저는 위의 계산 결과를 가지고 다음과 같은 결론들을 조심스럽게 유추해내고자 합니다.

제 독단적인 견해일 수도 있으니 여러분들의 다양한 의견을 바라 마지 않습니다.

 

1. 삼국사기의 기록은 연대상으로 1년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또 다른 근거를 새로이 하나 찾아 냈다.

2. 김부식이 삼국사기 편찬시 동일한 기록이 발견될 때에는 중국 쪽의 기사로 일치시켰을 가능성이 보인다.

 

덧붙여 삼국사기의 기록은 정말로 김부식이 임의로 조작하지 않았다고 느껴지기도 하는군요.

두서 없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05814일 대구에서 신용득

 

by 팔공산 | 2006/10/28 14:07 | 천문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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